2024 서울마라톤 참가하다
일요일 아침 7시 50분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역. 러닝화를 신고 삼삼오오 몸을 푸는 사람들이 백 명은 넘었다.
“곧 출발합니다. 얼른 올라가세요.”
안내 요원의 재촉에도 선수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초봄 이른 아침이라 날씨는 다소 쌀쌀했다. 실내에 있다가 막판까지 체온을 유지하려는 모양이었다. 선수들의 복장은 대부분 티셔츠에 바람막이 정도. 달리는 중에는 열이 나기 때문에 티셔츠면 충분하다. 일회용 비옷이나 세탁소 비닐을 입고 있다가 버리려는 사람들도 보였다.
"우리도 빨리 올라가야 하는 거 아냐?"
"어차피 당신은 D조라 늦게 출발한다며. 괜히 일찍 가면 춥기나 하지."
나를 응원하기 위해 따라온 남편이 말렸다.
출발은 순차적이었다. 제출한 성적에 따라 A, B, C, D의 네 개 조로 나뉜다. 참가자가 2만 명이니 불가피한 선택이다. 이번이 첫 출전인 나는 자동적으로 D조에 배정되었다.
출발점은 잠실종합운동장 동문이다. 주 경기장은 26년 말까지 공사 중이다. 경기장 트랙에서 출발하는 호사는 누리지 못했다. 풀코스는 광화문을 출발해 서울 전역을 누빈 후 종합운동장에 도착한다.
10km 코스는 단출했다. 올림픽로로 빠져나와 동쪽으로 2km 달린다. 잠실역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꺾어 송파대로를 3km쯤 달린다. 가락시장역에서 반환점을 돌아 왔던 길을 거슬러간다.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연습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겨우내 너무 춥거나 감기에 걸려 있었다. 2주 전 10km 딱 한번 뛰어본 게 다였다. 그리고 다시 감기에 걸렸다. 한번 해봤으니 완주는 가능하지 않을까.
"대회뽕이라는 게 있어. 평소보다 기록 잘 나올 거야."
남편의 응원을 믿어보기로 했다.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오자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있었다. 플래카드와 행사 부스 등을 보니 축제 분위기가 났다.
8시가 되자 A그룹이 출발했다. 선수가 많다 보니 출발선까지 달리지 못하고 걸어서 이동했다. 선수들이 모두 출발하는데만 20분이 넘게 걸렸다. 나는 맨 끝에서 출발했다.
출발선을 지난 선수들이 도로에 쏟아졌다. 중간그룹은 사람에 치여 추월도 못할 지경이었다. 스마트워치를 보니 1km당 7분의 속도가 나왔다. 평소 8분에 비해 1분이나 빨랐다. 이런 게 대회뽕이란 건가. 시작이 좋았다.
시작만 좋았다. 경험상 초반 1~2km 까지는 몸이 덜 풀려 버겁다. 그 구간만 지나면 한결 몸이 가벼워진다. 2km가 지났는데도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평소에 없던 갈증도 났다. 감기로 소진된 체력이 회복이 안된듯했다. 평소와 다른 초반 오버페이스 때문일지도 몰랐다.
8km는 더 가야 한다. 어떻게 신청한 대회인데. 포기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팔다리를 기계적으로 움직이면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목표를 쪼개자. 반환점에 가면 급수대가 있다. 반환점까지만 가자. 절반만 가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갈 수 있겠지.
반환점도 멀다. 일단 롯데월드 사거리까지만 가자.
아니, 일단 저 앞 신호등까지만 가자.
아니, 일단 한 발씩만 내딛자.
4km쯤 가자 지하차도가 나왔다. 내리막에서 하중이 늘어 페이스가 흔들렸다. 오르막에서 힘을 쓰자 호흡이 가빠왔다. 장거리 달리기에서 호흡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지 못한다는 신호다.
반환점이 가까워오자 응원하는 사람들과 선수들이 내는 함성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급수대에서 물이 담긴 종이컵 하나를 낚아챘다. 많이 마시면 배가 아플까 봐 목만 축였다.
계속 스마트워치를 보며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했다. 제한시간이 한 시간 반이라 1km 당 8분의 속도로 달려야 안전했다. 시간이 점점 늘어나 9분을 넘겼다.
롯데월드를 지나고 3km가 남은 지점에서 자세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직각을 유지하던 양팔은 주유소 풍선처럼 흐느적거렸다. 발은 뛴다기보단 끄는 것에 가까웠다.
달리는 내내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왜 달리고 있지?"
아무도 나에게 마라톤 대회를 나가라고 등 떠밀지 않았다.
"이 달리기의 끝은 있을까."
물론 끝은 있다. 인생 모든 것의 끝은 있다. 당시에는 영원할 것 같아도 지나고 보면 다 있다.
드디어 잠실 아파트 단지를 지나 오른쪽으로 꺾으면 결승점이었다. 몇 백 미터만 달리면 이 고통이 끝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토기가 올라왔다. 팔다리가 내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그냥 달리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결승점을 백 미터쯤 남겨두고 남편이 보였다. 스마트폰으로 나를 찍고 있었다.
기록칩이 결승점을 통과하자 '삐-'소리가 들렸다. 기록은 1시간 22분. 안내요원의 지시에 따라 인도로 가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았다. 숨결에서 치약맛이 났다.
남편이 웃음을 멈추지 못한 채 다가왔다.
"똥 싼 채 달린 줄 알았네. 왜 그런 모양으로 뛴 거야?"
찍힌 비디오를 보니 남편의 반응이 이해됐다. 추레한 중년 여성이 우는 얼굴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지 않은가. 인생이 다 그렇듯이.
완주 메달을 받아 목에 걸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얼굴은 아직도 열이 식지 않아 벌갰다. 머리띠로 아무렇게나 넘긴 머리는 산발이었다. 나는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