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의 유행이 갈 때까지 갔다. 사오십대의 전유물이었던 마라톤이 갑자기 핫한 취미가 됐다. 소위 '인스타그래머블'한 (인스타그램에 올릴만한) 스포츠 계보의 왕좌를 물려받았다. 골프나 테니스의 비용을 감당 못한 나머지 가성비로 선택했다는 해석도 있다.
단체로 모여서 달리는 소위 러닝 크루의 민폐는 언론에도 다룰 정도다. 길을 막고 달리거나 소리를 지르고 단체사진을 찍는다고 찻길을 막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최근 석촌호수는 3인이상, 반포종합운동장은 5인 이상의 단체러닝을 금지했다.
주요 마라톤 대회는 참가조차 어려워졌다. 온라인 티켓팅에 강한 MZ가 대거 참전했기 때문이다. 국내 3대 마라톤대회 중 하나인 jTBC 서울 마라톤대회는 내가 접수한 게 기적이다. 역시나 참가자의 2/3가 30대 이하다. 신청에 실패한 수많은 중년들의 원성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얼른 젊은 층의 마라톤 붐이 지났으면 좋겠다.
보통 10km 마라톤은 제한시간이 1시간 30분인데, 이 마라톤은 10분 짧은 1시간 20분 내에 들어와야 한다. 기록이 딱 그 정도인 나로서는 부담된다.
출발지는 상암 월드컵공원, 망원역을 지나 합정역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택시운전사인 아버지가 항상 건넌다는' 노래가사로 유명한 양화대교를 건넌다. 노들길을 따라 여의도로 들어가서 KBS방송국 앞을 지나 여의도공원을 둘러 마포대로에서 끝나는 여정이다. jTBC는 시그니처코스라고 명명한다.
풀코스는 여기까지 같이 오다가 마포대교를 건너 강북을 가로질렀다가 올림픽공원에서 끝난다.
풀코스 1만 5천 명, 10킬로 2만 명 등 총 참여인원 3만 5천 명의 초대형 대회다. 8시부터 출발하는데 풀코스 그룹이 6개, 10킬로 그룹도 4개다. 시간표를 보니 내가 속한 10km C그룹은 9시가 다 되어 출발할 예정이었다. 짐을 맡기지 않을 것이므로 8시 반까지 가도 되겠다. 안내책자에는 7시까지 오라고 했다.
항상 짐을 맡아주던 남편이 사정이 생겨 동행하지 못했다. 짐이라 해봤자 출발 전 체온유지를 위한 바람막이뿐이다. 저번 대회 때 눈여겨본 대로, 다이소에 가서 사 온 일회용 우비를 집에서부터 입고 왔다. 출발직전에 벗어서 버리면 된다. 다들 그렇게 한다. 천 원을 버리는 게 아깝고 남들 이목이 상관없다면 세탁소 비닐을 쓰고 와도 된다.
웬일로 나는 C그룹에 배정됐는가. 기록증을 제출하지도 않았는데. 항상 시간제한에 걸려 교통통제가 풀리고 회송버스 탑승을 종용받는 악몽을 꾸는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교통통제는 당연히 맨 마지막 그룹을 기준으로 설정할 터이니 그만큼 시간여유가 있다는 셈이다. 좀 안심이 됐다.
8시 20분쯤 서울지하철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에 도착했다. 대회 공식티셔츠인 보라색 티가 별로 보이지 않아 많이 늦었나 걱정했다. 지하철 화장실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요의를 해결하니 안심이 됐다. 대부분 참가자들은 경기장 맞은편 공원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각 그룹별의 선두에는 주사위 모양의 대형 풍선이 떠올라있었다. 내가 출발할 10km C그룹의 풍선은 대로변에 나와있지도 못했다.
한창 유행인 노래들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피트니스센터에서 들었던 '아파트'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애플워치가 소음을 감지하고 경고를 줬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옷을 입고 있어 동질감이 들었다. 런데이 앱의 가상마라톤 모드를 켜고 달리려고 했는데 사람이 많아서인지 데이터 연결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나이키러닝앱은 출발 직전에 켜졌다.
가장 중요한 건 페이스 확보다. 경기 분위기에 휩쓸려 오버페이스로 달리면 후반부에 퍼지게 된다. 제한시간은 1시간 20분이므로 1km당 8분보다만 빠르게 달리면 된다. 처음엔 좀 쌀쌀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기온이 빠르게 올라갔다. 심지어 덥다 싶었다. 지난주에 목감기에 걸려서 컨디션이 최상은 아니었다. 봄에 동아마라톤 때도 그랬는데 대회 직전마다 감기에 걸리는 것인가. 원래 세상일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벌어진 일에 대응해야 한다.
항상 그룹 후미에서 출발했던 터라 중간에서 출발한 건 처음이었다. 10km 참가자가 2만 명이라니, 세 번째 그룹인 내 뒤로도 최소 수천 명의 선수들이 있다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선수들이 나를 추월해 갔다. 5천 명이 나를 추월하지 않는 한 내가 꼴찌가 될 일은 없다. 회송버스는 이제 그만 잊자.
중간중간 길이 좁아지는 구간이 나오자 병목현상이 생겼다. 특히 1차선인 노들길이 심했다. 아예 선수들이 멈춰버리는 구간이 있을 정도였다. 이제 조금 달려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장거리 달리기는 반복된 동작을 항속으로 달려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해야 최대 효율을 낼 수 있다. 내 페이스가 아니라 몰려든 인파 때문에 속도가 바뀌면 불필요한 힘이 들게 마련이다. 명절 고속도로에서 브레이크와 엑셀을 번갈아 밟으면 운전이 더욱 피곤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날도 생각보다 더워서 8km가 넘어가자 힘에 부쳤다. 여러 번 뛰어봤기 때문에 10km 완주는 너끈히 가능하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여의도 공원을 돌아 마포대로에 들어서 몇백 미터 앞 결승선이 보일 때의 기분이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거 같다는 표현은 진부하다. 그래도 달리 말할 방도가 없다.
결승선을 지나고서도 메달과 물을 받으러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지난번 서울하프마라톤은 결승점이 여의도 공원 안쪽으로, 도착하자마자 기념품과 메달을 주고 동선이 보다 깔끔했다. 이번 대회가 벌써 다섯 번째인데, 대회를 다니다 보디 진행에도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아쉬움은 언제나 있다.
다음 목표는 무엇이어야 할까. 올초 이 대회를 신청할 때만 해도 1시간 30분에 겨우 달리는 내가 10분이나 기록을 단축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아니, 그전엔 10km를 달릴 수나 있을까 걱정했다. 10km까지만 달려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막상 달성하니 이젠 하프마라톤에 언감생심 욕심이 생긴다. 하프 까지는 연습하면 가능하다고 많이들 말한다. 하프대회의 시간제한은 2시간 30분이다. 즉, 10km를 1시간 10분에는 뛰어야 한다. 속도와 거리를 둘 다 늘려야 하는 큰 과제가 생겼다. 성공여부와 관계없이 인생은 도전으로 활력을 받는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