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혹한 평가에 단단해지는 나만의 마인트 컨트롤
미친 듯이 달렸다. 마지막 한 씬을 남기고 차마 글이 써지지 않았다.
글을 끝맺지 못하게 한 것은 상실감이었다.
이 시나리오 덕분에 길지 않은 시간 내가 많이 울고 웃고 의지했던 것 같다.
그 시간이 좋았던 것 같다. 이렇게 헤어지기 어려운 걸 보면.
이 시나리오는 남편의 짧은 단편소설로부터 시작한 이야기였다.
고작 8페이지의 글이었는데, 나는 그 글을 읽고 정말 오열할 듯 울었다.
남자 주인공의 아픔이 너무 상상이 되었던 것 같다.
약 2년 전의 이야기다.
그걸 표현해 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기꺼이 해보고 싶었다.
다행히 기회가 주어졌다.
이번에 쓴 글도 당연히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그동안 나의 취향과 생각들이 차곡차곡 쌓였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많은 걸 확인하고 대면하고 직면하는 좋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이 글의 운명은 아직 정해진 것이 없다.
나에겐 소중한 페이지들이지만, 살아남을 수 있을지 두고 봐야 한다.
(원작자가 읽고 욕할 수도 있다.)
확실한 건 이제 이 글은 나와 분리된다.
이 감정은 아이를 잘 키워놓고 떠나보내는 심정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애썼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 혹은 공허함이었다.
또한 이제 냉혹한 평가를 받아들여야 할 일만 남았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 두려움 때문에 오늘 하루 생각보다 괴로웠다.
마음이 괴로울 때면 읽는 책이 있다.
<고요함의 지혜>의 죽음 편에 우리는 날마다 작은 죽음을 경험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내가 그 작은 죽음을 기꺼이 껴안을 수 있을 때 삶이 좀 더 명료해지고, 빛난다는 식의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상실감, 허무함. 무력감. 아쉬움을 껴안기로 했다.
그리고 내 주인공에게 인사를 했다.
수고했어. 주원아.
우리 꼭 다시 만나자.
고마웠어.
나에게도 인사를 했다.
수고했어. 온니야.
타인의 평가와 상관없이 이런 작은 경험이 모여 너의 삶은 알록달록해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