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바뀌다
◆ 가을 운동회 ◆
추수가 끝나면 학교에서 가을 운동회를 했다. 본교 교장 선생님은 길이 멀어 분교를 방문하지 않았다. 대신 노트 연필 등 학용품을 상품으로 활용하라고 보내줬다.
운동회는 일 년 중 가장 큰 잔치였다. 천막을 치고, 커다란 솥을 걸어 놓고 국을 끓이고 젖먹이부터 노인들까지 전 주민이 참여하여 달리기 줄다리기 시합을 했고, 고학년들은 태권도 품세를 자랑했다.
가을 운동회를 하기 전에 우리 선생님들은 학부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태권도, 체조, 무용 등을 가르치고, 기마전, 모래주머니를 만들었다. 준비할 것이 많았다.
달리기를 하면 어른들 한, 두 명은 축대 위에서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나오는 학생들을 잡아야 했으며 달리기를 하는 학생들은 팔을 힘껏 돌리며 뛰어야 축대 쪽으로 가지 않았다.
다른 곳은 주변에 관공서가 있으면 관계자들을 초청했지만 그곳은 5개면 경계지역으로 위치가 애매해 그냥 생략했다.
운동회가 끝이 나면 하루 날을 잡아 본교로 갔다. 나를 포함하여 선생님들 3명이 6학년 4명을 데리고 본교로 넘어가 졸업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산길을 10여 킬로미터 걸어 본교로 넘어가 본교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 6분, 6학년 학생(11명) 전체가 모여 단체 사진을 찍고, 교장선생님이 베푸는 점심을 먹고 왔다.
단체 사진 한 장으로 졸업앨범을 갈음했다. 앨범을 만들어봐야 산골 학부형들이 구입할 경제력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12월이 되니 산골 분교에는 겨울이 시내보다 엄청 일찍 찾아왔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골바람은 시베리아 북풍보다 매서웠다.
주민들은 겨울이 되면 농사일이 끝나고 할 일이 없어 땀 흘려 가꾼 감자를 땅속에 묻어 두었다. 멧돼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덫을 만들거나 함정을 팠다. 계곡에서 개구리와 민물고기를 잡아 막걸리 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늦가을에 개구리가 월동을 하기 직전에 잡으면 영양분이 많이 있어 고소하기도 하고 맛이 좋았다.
집들은 조금씩 떨어져 산비탈에 있지만 각자 제사나 가장의 생일이면 동네 어른들을 불러 우의를 다니며 잔치 아닌 잔치를 했다.
◆ 청춘 남녀 ◆
산골이다 보니 해가 일찍 떨어지면 선생님들 방에서 TV를 보다가 9시 뉴스가 끝이 나면 내방으로 돌아와 책을 보거나 다음날 학습 준비를 했다.
“선생님!”
밤 10시 즈음 누가 창문을 두드리며 나를 불렀다. “누구세요?”하고 창문을 열어보니 2학년 박선주가 고모와 같이 와 있었다.
가을 운동회 동네 사람들이 모였을 때 인사를 하여 얼굴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선생님! 오늘 집에서 음식을 조금 했는데 드셔 보세요.”
수줍게 말하며 창문 위로 대바구니를 올려놓고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도망치듯 가버렸다.
가고 난 뒤 대바구니를 열어보니 감주와 잡채, 백설기 등이 있었다.
저녁밥을 먹은 지 몇 시간이 지난 뒤라 출출하던 차에 고마웠다. 그렇다고 혼자 먹을 수가 없어서 음식을 가지고 선생님들 방에 가서 선영이 고모가 가져왔다고 했더니 선생님들이 놀리기 시작했다.
“선주 고모가 김 선생님한테 마음이 있는갑다, 하하!”
“이곳에서는 귀한 감주도 있고. 김 선생님 좋지요?”
“선생님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괜히 낯이 뜨거워졌다.
선주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까지 유학을 갔다가 온 엘리트였다. 평양에 거주하다가 6.25 때 남하하여 그 마을에 흘러들었다. 선주 아빠와 고모는 할아버지를 닮았는지 꽤 똑똑하였지만 할아버지가 세상에 나가서 사는 것을 싫어했고, 산골에 사는 것에 불만을 품은 선주 아버지는 거의 술로 지새는 일이 많았다. 동네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편이었다.
20대 처녀가 산골에 묻혀 지내는 것이 이상했지만 절대 가부장적인 집안에서는 발언권이 없었다.
어떤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총각 선생이 와서 조카를 가르치고 있으니 아마 한 번쯤 보고 싶었을 것이었다. 그렇게 예쁜 얼굴을 아니었지만 지혜로워 보였다. 인연이 아니었는지 더 이상 진척은 없었다.
이렇듯 많은 추억도 있고 어린 동심의 세계에서 지내다 보니 좋았지만 첩첩산중에서 청춘을 보내는 게 맞는지 곰곰이 생각을 자주 했다.
◆ 인생을 결정하다 ◆
상주경찰서에서 형사반장을 하셨던 아버지가 생전에 막걸리를 한잔 드시고 들어오시는 날에는 어김없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놈의 금티, 금티. 더러버 더러버 천만번 더러워.”
(당시에는 경찰 간부 경위가 되어야 정복 모자에 금테를 둘렀다)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교직에 30년 걸려 교장 하느니, 경찰 30년 걸려 경찰서장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하게 되었다.
도덕적으로 존경받는 교사보다 정의와 명예를 중시하는 경찰이 나의 적성에 맞을 것 같았다. 1982년 초 겨울 방학 때, 선생님들 몰래 경찰관 채용시험을 봤다. 체력검정과 학과시험을 치렀다.
82년 5월에 부평 경찰 종합학교에 입교를 하여 8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
1982년 8월 21일부터 경찰관 생활을 시작했다. 꿈에도 그리던 총경 경찰서장은 안 되었지만 바로 밑 계급인 경정이라는 계급으로 36년 4개월 만인 2018. 12. 31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다.
그중 형사 생활이 33년이 넘었고, 특진은 물론 대구의 대형사건, 사고뿐만 아니라 조직폭력배 소탕 등 전부 내손을 거쳐 갔고, 딸 바보, 아들 바보가 아닌 형사 바보로 산 세월이었으며 운명이고 팔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그동안 숱한 희로애락이 있었지만 말 못 할 사연도 많았다.
분교에서 가르친 제자 중 1명은 인천에, 1명은 대전에, 1명은 대구에 살고 있다는 것을 풍문으로 전해 들었다. 다들 잘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 만나지는 못해도 잊지는 말고 살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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