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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샷추가 May 02. 2022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밟아도 밟히지마 ep. 13]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는 주의지만 난 사실 변화를 싫어한다. 지극히 사소한 행동들, 예를 들어 맨날 같은 밥집만 간다거나 단골 미용실도 쉽게 바꾸지 못하는 나는, 결정을 바꾸는 것에 대한 초기 불안이 있는 편이고 쉽게 정이 드는 성격이라 미안한 마음에(그것도 의리라고 한다면 의리로-) 가던 곳, 했던 것을 계속 가고, 계속 하는 성격이다.  또한 나는 내가 한 결정에 대체로 불평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때론 지나치게 긍정적이어서 판단을 잘 못 하기도 한다. 어렸을 적엔 내가 봤던 영화는 다 재미있는 영화가 되어있을 정도로 무한 긍정주의가 심했다. 의미를 두면 의미가 없는 것이 없었다.           



이러한 내 모습은 직장생활에서도 발휘되었다. 나의 소속감은 항상 대단했으며, 밖에 나가 회사를 욕하거나 아쉬워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직장생활을 하며 힘들었지만 좋은 점도 분명히 있었고 무엇보다 나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한때 몸담았던 회사에 충성(?)을 맹세했던 것도 사람이 좋았기에 가능했다. 순수했으며 어리석었다.        


   

실제로 아나운서들의 취업 준비는 끝이 없다. 지역 지상파로 합격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중앙으로, 서울로 진출하는 것이 대부분의 바람이었기에 합격 후에도 계속 언론고시라는 것을 준비한다. 똑똑한 친구들은 굵직굵직한 대형사에 합격해도 ‘저는 여기가 끝이 아니에요. 결국엔 중앙으로 갈 거예요.’ 하며 KBS, SBS, MBC, JTBC 등이 아니면 의미 없다고 이야기한다. 진심으로 멋지고 부럽다. 난 왜 그렇게 똑똑하지 못했을까?               



지역 민영 방송사는 SBS의 8시 뉴스가 시작되면 20분쯤 지역으로 넘어오는 방송을 담당한다. 나는 당시 지역 민방의 메인 앵커였고 8시 20분이 되면 지역뉴스를 전하는 일을 담당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많이 부족했기에 엄청나게 혼나기도 했지만 배울 수 있음에 즐거웠고 주요 소식을 직접 전한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날에 진행했던 원고들은 모두 버리지 않았었는데, 9시에 퇴근을 해서 집에 돌아오면 다시 원고들을 읽어보며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계속된 자기반성이었고 나 자신에게 혹독했다.        


        

뉴스뿐 아니라 교양 프로그램도 맡으면서 일주일에 하루는 야외 촬영 후 저녁 뉴스부터 8시 뉴스까지 진행하는 일정이었다. 고된 일이었지만 일할 수 있음에 감사했고 부족한 나를 탓할지언정 일이 많음에 불평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항상 밝은 모습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선배들이 정말 많이 예뻐해 주셨다. 잠깐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기면 종종 카페에 데려가 나의 스트레스를 대신 풀어주기도 했고, 퇴근 후에는 유명한 음식점, 고깃집, 횟집 등등 혼자 지내는 후배의 배를 든든히 채워 보내기도 했다.        


   

어느 날이었다. 타 지역에서 누구보다 잘 적응하고 있는 점을 좋게 보셨는지 하루는 팀장님이 넌지시 물으셨다. 


“다른 데 시험 안 볼 거지? 이곳에서 평생 지낼 수 있지?”   


       

왜 그걸 프러포즈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어렸고 계약직이었다. 어렸기에 나는 순수한 꿈을 꿨다. ‘계약직이 무기계약직이 되기도 하잖아.’ 로또 당첨보다 확률이 낮은 그 가능성에 난 기대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팀장의 그때 그 말을 일종의 계약 연장의 시그널로 받아들였던 내가 짠하다.  


              

난 재직 시절, 많고 많았던 시험 기회를 다 저버렸으며 채용 공고 따위 전혀 찾지 않았다. 좋은 기회가 생겨도 현 직장에 배신을 하는 것 같아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계약 연장을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못 한 채 충성을 다했다. 


     

계약 연장이 되지 않았음을 통보받던 날, 난 모든 것이 기억난다. 전날 아주 작은 실수(?), 사실 실수도 아니다. 그냥 보도국장의 마음에 들지 않은 재킷을 입었다는 게 나의 실수라면 실수겠다. (의상은 담당 스타일리스트에게 받는다. 난 대부분의 의상을 존중해주었고 주는 대로 잘 입는 편이었다.)           



보도국장을 만나고 온 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걸 왜 입어가지고.” 그의 혼잣말은 너무나 크게 들렸고 그 말이 내게 하는 말인 걸 나는 알았다. 그 후 나를 부르더니 보도국장이 그 의상에 화가 많이 나셨고 내년 계약 연장은 힘들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의상 때문에?!?!?!          



근로자의 계약 문제는 단 하루의 우발적인 생각으로 결정되는 것은 절대 불가하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정말 미개한 결정 방식에 부끄러워해야 한다. 당시 그 문제는 아마 나만 모르고 있었고 윗선에서는 그전부터 나왔던 이야기일 것이다. 곤란한 결정을 전달하긴 해야겠고 그 책임을 당사자에게 돌리면 조금이라도 합당한 결정처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팀장의 말대로라면 나는 뉴스 의상 때문에 국장에게 미운털이 박혔고 계약 연장이 되지 않았다.      


‘저보고 여기서 평생 살 수 있냐고 물어보셨잖아요!!!!!’     

‘오빠만 믿어’도 아니고 누굴 탓하겠나. 그 누구도 힘이 없는 것을. 소식을 들은 선배들이 많이 안타까워하셨고 도와주고 싶어 하셨다. 그렇지만 의사 결정 권한은 소수에게 있었다. 조직에서 힘이 있는 누군가의 눈 밖에 나면 답이 없다.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다.             


   




결과적으로는 나는 퇴사 후 더 잘 됐다. 경력, 처우 모든 면에서 그때 그곳의 나보다 훨씬 더 성장하고 성숙하였다. 하지만 계약 연장 불가 통보를 받았던 그 당시의 두려움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뉴스 잘 봤다고 전화 온 엄마에게 이 소식을 전하면서 나보다 더 놀란 엄마를 진정시키느라 난 울지도 못했다. 세상은 살만하다며 모든 것을 긍정으로만 바라본 내가, 처음으로 흑화 되는 기분이었고 철저하게 이 사회에서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조직에서 들리는 말을 일부만 믿는 의심병도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나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조심스레 걸러 듣는 것도 이때부터다.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렇지만 그 누구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만약 자신이 언제라도 이런 상황에 처할 수 있는 불안정한 고용 형태에 있다면 조직을 무조건 믿기보단 먼저 자기 몫을 제대로 챙겨라. 그래야 덜 다친다. 이건, 10년 전 내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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