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부부가 되고 나서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기다리는 임신의 소식이 수개월 째 찾아오지 않던 어느 무렵, 엄마와 한의원에 가서 약을 지어온 적이 있다. 아빠동창이었던 한의사 선생님께서는 진맥을 해주신 후, 특별히 임신을 방해할만한 요소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몸을 편안하게 해주는 약을 처방해주시겠다며 진료를 마칠 무렵이었다. 문득 남편의 사진을 볼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괜히 아빠친구분이기도 하니, 남편의 사진 중 제일 잘나온 사진을 찾아 보여드렸다. 별다른 말씀은 안하시고 진료를 마치셨는데, 그리고 두달 후, 난임병원에서의 정밀 검사를 통해 남편은 정상정자 수, 활동성 등이 상당히 떨어진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 한의사 선생님은 관상을 통해 난임의 원인이 1차적으로 남편에게 있다는 걸 아셨을까?
내 남편은 키가 178센치미터에 몸무게는 약 80키로 언저리, 건장한 체격을 가졌다. 생김새는 누가 봐도 남자 중의 남자라고 해야 될까. 순한 성격에 반해 외관은 강한 남성의 분위기를 풍긴다. 의학적 지식에 단 1%도 근거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남자스러운 생김새의 사람한테 소위 남성성 척도로 일컬어지는 정자수치가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느냐고.
자연임신이 약 10개월간 되지 않았던 원인 중 하나를 알고 난 후, 사실 나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때즈음의 나는 약 석달 이상을 회사에서 쉼 없는 야근과 주말출근으로 바쁜 시즌을 보내고 있던 터라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어있었는데 하필 이 시기에 우리의 첫 내 집 마련, 큰 대출 실행, 이사와 인테리어까지 중대한 이벤트들이 겹친 시즌이었다. 새벽퇴근을 일삼던 그 시즌의 나는, 가정의 이벤트들에 신경을 쓸 물리적인 틈이 없어 대부분의 일들을 남편이 혼자 처리해야 했다. 남편의 반복되는 혼밥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정의 수입의 절반을 벌어오는 대기업 대리로서의 역할만이 아니라 남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가정에 충실한 아내의 역할까지 감당해야 했던 나로서는 두개 다 완벽하게 해내기가 어려워 마음의 부채가 점점 커져갔다. 그러다보니, 늘 퇴근도 늦고 가뜩이나 몸도 마른 편이라 허약해보이는 며느리가 걱정이 되셨던 시어머니께서는 어느 날 통화로 '니가 부담을 가질까봐 그간 말을 못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약을 한 재 지어줄테니 한약 한 재 더 먹어보는 건 어떠니?'라고 말씀하셨다. 한번도 아기에 대해 부담을 주신 적 없던 어머님이셨지만, 우리 부부의 아기 소식이 늦어지는 1차적인 원인이 며느리가 아닌 아들에게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신 까닭이리라. 나는 '어머니, 말씀 감사하지만, 저는 더 약을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라고 말씀 드렸고, 그 순간 마음의 부채가 조금 사라짐을 느꼈다. 어머님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 역시도, 운동도 안하고 근력은 1도 없는 내가 난임의 원인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따지는 것을 떠나서, 어쨌거나 이로써 우리는 나라가 인정하는 난임부부의 요건을 갖추게 되었다. 회사 의료비 지원을 위해 받은 진단서에는 '상세 불명의 불임' 이라고 명확하게 기재 되어있었다. 30대 초반의 건강한 우리는, 이유를 불문하고 인공수정, 시험관 그 말로만 들었던 무시무시한 일들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사실 꽤 오랜 시간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부정했다. 진료실에서 말로는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라고 해놓고서는, 그래도 그 전에 기적적으로 자연임신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없었고, 인공수정 1차를 시작하게 된 후 인공수정 성공률이 15% 수준에 그친다고 하였을 때도, 우리에게는 그 로또같은 기적이 당연히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역시 그런 기적도 오지 않았다. 인공수정 2차도 마찬가지였다.
난임을 진단받은 충격에서도 아직 벗어나오지 못한 때였는데, 인위적인 시술을 해도 임신이 쉽사리 되지 않는다니! 우리는 곱창 집에서 소주를 마시며 같이 울었고, 욕도 하며 웃기도 했다. 난임부부에게는 한달 한달이 참 귀하고 소중하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쉽고 또 한편으론 무섭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우리는 서서히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일련의 과정마다 우리는 손을 마주잡고 간절히 기도했고, 노심초사했으며, 안좋은 결과앞에서는 또 술을 한잔 하며 같이 울고 털어냈다.
최근 텔레비전을 돌리다가 고등학생이 엄마가 된 티비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예기치 않게 아기가 찾아와 힘들어 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남편은 '왜 준비가 안된 애들한테 아기를 주고, 우리는 잘 키울 준비가 되었는데 안주는 거야~!'하며 하늘을 보며 귀여운 성질을 냈다. 사과가 열릴 줄 알고 한 계절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데, 사과가 아닌 쌩뚱맞은 열매가 열리는 것을 본 적이 우리 인생의 한두번인가. 하지만 돌아보면, 그 다른 열매는 우리에게 늘 더 큰 축복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 부부는 난임 진단을 받고 나서 사랑이 더 두터워졌다. 주사 공포증이 있는 남편이 유투브를 통해 주사에 대해 공부하고, 얼굴에 식은 땀을 감추며 찬찬히 나에게 주사를 놔주는 모습을 보았던 순간, 나에게 이 과정들은 더이상 힘든 시간이 될 수 없었다. 끝나지 않은 이 난임의 여정이 결코 즐겁다고 할 순 없지만, 우리가 서로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고 위로하며 서로에게 더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귀한 시간인 것은 틀림이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