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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 bae Nov 01. 2024

비밀의 언덕, 솔직한 게 좋은 거잖아요


1996년, 은남초등학교 5학년 7반 이명은


누군가의 선물을 더없이 신중하게 고심하는 주인공 명은. 그 시절 문방구에는 초등학생이 원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다 있었는데 액자, 캔들, 머그컵,  손수건 등등 수많은 선택지 중에 고르고 골라 명은이 선택한 것은, 손잡이가 달린 하얀 머그컵.



핑크색 포장지에 금색 별 장식을 달고 집 앞 대문까지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영 안될 것 같아. 책가방을 내려놓고 이내 문방구로 뛰어간다. 선생님은 핑크색을 더 좋아하실 거 같아서요.



선물에 한없이 마음을 쏟는 명은은 머그컵에 자신의 숨겨둔 본심을 슬쩍 얹는다. 학기 초 실시하는 면담(가정환경조사서)을 교실이 아닌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하자고 건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꾸만 쪼그라들게 만들어



영화의 배경은 1996년이고, 그 당시에는 '가정환경조사서'를 통해 너네 집 아비 어미는 뭐하시노? 대놓고 물었다. 명은은 창피했다. 시장에서 젓갈가게를 하는 부모님을 드러내기 싫어, 거짓을 말하고 그 거짓을 지켜내기 위해 치밀한 기획력과 발칙한 실행력을 선보인다.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솔직해질 수가 없다. 명은은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가정환경조사서'로 대두되는 그 당시 시대적 환경은 확실히 노골적이고 폭력적이고 솔직하게 드러낼 것을 강요하고, 그 상황에서 명은은 자꾸만 쪼그라든다.



영화 말미 '가정환경조사서'가 아닌 스스로를 표현해 보라는 새 학년 담임선생님의 제안에, 명은은 들뜨고 신난 기분으로 형형색색 무언가를 열심히 그려나간다. 더 이상 포장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어른이 되어가는 명은 앞에 수없이 많은 가정환경조사서가 말간 얼굴을 들이밀 것이다.



성적으로. 대학 간판으로. 직업으로. 소득으로. 타는 차로. 사는 집으로. 사는 지역으로. 배우자의 소득으로. 배우자의 부모님의 소득으로. 자녀의 성적으로 대학 간판으로 직업으로 소득으로 타는 차로 사는 집으로 사는 지역으로. 자녀의 배우자의 소득으로. 자녀의 배우자의 부모님의 소득으로.



대놓고 노골적이기보다는 한층 더 교묘해진 거 아니냐고. 수직적으로 나열되는 층위 속 어딘가에 놓여있는 기분을 떨쳐내기 어렵지 않냐고. 다 큰 어른이 된 명은에게, 묻고 싶다.



솔직한 게 좋은 거잖아요.



철저하게 자신을 포장하던 명은 앞에 '혜진' 자매가 등장한다. 창피해 하거나 애써 숨기려 하지 않고 저렇게 발가벗은 듯 이야기할 수도 있는 거구나.



술집 아가씨인 엄마를 두고도, 이란성 쌍둥이도 자매도 뭣도 아닌 것을 두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솔직하게 써 내려간 혜진 자매의 글은, 명은의 세계를 뒤흔든다.  



'가족'을 주제로 한 글짓기에서 명은은 한껏 솔직해져 버리고. 이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불편함으로 되돌아 온다.






<손녀로부터 온 편지 중에서>


우리 아빠는 놀기만 좋아하고 게을러요

단 한 번도 가게의 문을 먼저 열어본 적이 없어요

오징어젓, 명란젓

맨날 싸주는 젓갈 반찬도 정말 창피해요

다른 아빠들은 다 바쁘다던데

우리 아빠는 매일 잠만 자고 놀러 다녀요

양복 대신 무거운 청바지를 입고 다니고

구두 대신 더러운 운동화를 신고 다녀요

서류 가방은 없고요

가게에 갈 때마다 자고 있는데

정말 책임감이 없는 것 같아요


솔직히 아빠보다 더 창피한 것은 엄마예요

모자와 장화를 신고 다니고 옷은 늘 더럽거든요

엄마는 사람들의 시선이 창피하지 않은 걸까요?

엄만 돈밖에 몰라요

친구를 위한 마음도 없고 환경을 보호하지도 않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마음도 없고

입만 열면 우리 앞에서 아빠 욕을 해요

교양도 없어 말할 때마다 귀청이 따가워요.






사실 가족만큼 낱낱이 까발려지기 쉬운 관계도 없다. 한없이 모순적이고 날것 그대로의 인간을 가까이에서 대면할 수 있는 것이 가족이기도 하니까.



게다가 주인공 명은처럼 예민하고 섬세하고 감성적이라면 온전히 좋아하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바늘구멍 만큼이나 힘겨운 일이 된다. ​


솔직한 게 과연 좋은 걸까?



오늘 하루 솔직했다면 어떨까? 내가 만약 상사에게 오늘하루 당신의 무능함과 이 일의 하등 쓸모없음에 대해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면,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성을 지르고 나의 밥벌이를 한층더 힘겹게 만들 것이다.


모순덩어리인 인간들이 모여 살아가는 데 적절한 거짓은 반드시 필요한 장치이기도 한다. 솔직함은 두렵다.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상대방을 찌른후 나 자신에게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솔직함을 강요할 수 있는 관계가 있다. 바로 자기자신과의 관계다. 스스로에게 만큼은 한톨의 거짓없이 솔직할 것을 강요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에 대해 뭐가 뭔지 알아채기 어려워지고 말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이명은, 자그마한 아이의 마음 다양한 감정들 속에서 함께 유영할 수 있는 시간, 영화 비밀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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