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풀거리는 치마 또각이는 구두, 화사한 웃옷에 하얀 레이스 챙넓은 모자가 잘 어울리는 꽃과 같은 주인공 미자. 예순여섯 중년의 그녀는 여전히 마음속 꽃을 품고 살아간다. 어느 날 우연히 동네 문화원에서 시를 배우게 되고, 어딘가 우아하고 고상한 것이 주인공 미자와 퍽 잘 어울린다.
맨드라미 꽃말 뭔지 아세요? 방패래요, 방패같이 생겼잖아요. 우리를 지켜주는
강의가 끝날 때까지 한 달 내, 시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미자는 종이와 펜을 든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잘 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시상을 찾기 위해 사과를 보고, 꽃을 보고, 나무를 올려다보고,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본다는 것, 잘 본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시를 쓴다는 것은 미자에게 현실을 마주하지 않게 하는 방패와도 같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잘 봐야 돼요, 우리가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보는 거예요. 본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잘 보는 것이 중요해요.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이 사과를 몇 번이나 봤어요? 천 번? 만 번? 백만 번? 틀렸어요.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이 사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한 번도. 지금까지 여러분은 사과를 진짜로 본 게 아니에요. 사과라는 것을 정말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 진짜로 보는 거예요." <영화 시, 김용택 시인 대사 중에서>
영화에는 음악이라 부를만한 것이 두 번 등장하는 데,
한번은 손주의 방 컴퓨터에서 들려오는 아마도 윤도현의 목소리로 짐작되는 헤비메탈류의 음악이다. 주인공 미자에게는 듣기 힘든 괴성으로 다가오고, 막무가내로 키보드를 내리치지만 알 수 없는 모니터 화면과 함께 오히려 소음은 커져갈 뿐이다. 결국 그녀는 전원을 꺼 버린다.
두 번째는 주인공 미자가 노래방에서 최유나의 와인 글라스를 부르는 장면이다. "오늘도 서투른 몸짓으로 술잔을 잡는 내가 미워미워, 이제는 미련의 옷을 벗어던져 버리고 망각의 잔을 마시고 싶어."
그렇다, 미자에게 현실은 알 수 없는 모니터 화면과 듣기 힘은 괴성으로 다가올 뿐이다. 그러니 꽃으로 방패를 삼아야 하고 망각의 잔을 마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집단 성폭행을 당하던 중학교 3학년 소녀가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가해학생 중 한 명이 자신의 손주라는 사실. 500만 원씩 삼천만원을 모아 피해자 어머니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합의의 시도.
뒷정리를 끝내고 서둘러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 전기세가 많이 나오는 것도 걱정하는 상황에 돈 오백만 원을 구할 길은 없고 계속되는 독촉.
그 와중에 주인공 미자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게 되고, 전기 지갑 터미널.. 자꾸만 단어를 잊어버려 입으로 뱉어낼 수가 없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어딘가 우아하고 고상한 것이라 생각했다.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스스로를 지켜주는 방패와도 같은 것, 꽃을 보고 나무를 보고 새의 소리를 듣는 것, 반짝이는 햇살 같은 것, 하지만 그렇게 찬란하고 눈부시게 아름답기만 한 것이 시라면, 왜 나는 이토록 이 영화를 보는 것이 힘들었을까?
현실이 아닌 이상을 환하게 꿈꿀 수 있는 거짓 같은 순수함과 선함이 묻어나는 그런 종류의 것을 좇는 내게 영화 '시'는 마주하기 꺼려지는 것을 못 본 척 피하지 말고 제대로 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과를 진짜 제대로 본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미자의 손주도, 학교 선생님도, 피해자의 어머니도, 가해 학생의 아버지들도, 가해 학생들도, 기자도, 슈퍼 아주머니도, 그 누구도 강물에 뛰어내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중학교 3학년 여학생 박희진, 아네스(세례명)에 대해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
진짜 본다는 것, 제대로 본다는 것은 무얼까? 어딘가 우아하고 고상한 것을 좇는 것이 아닌, 이 세계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보고 듣고 귀를 기울이는 일 아닐까.
주인공 미자만이, 소녀를 진짜 제대로 보려 한다. 아네스의 위령미사에서 희진 또래의 여학생들과 눈이 마주치고, 슬픔.. 안타까움.. 죄의식.. 뭐랄까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기 힘든, 끝내 쫓기듯 빠져나온 미자는, 입구에 놓인 희진의 사진을 가방에 훔쳐 넣어 자신의 집 식탁에 올려놓는다. 손주가 볼 수 있는 자리에.
엉겁결에 떠밀리듯 합의를 위해 찾아간 희진의 집 벽에 걸린 사진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가로이 살구 이야기를 늘어놓은 대상이 희진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그녀는 다시 한번 쫓기듯 자기를 빠져나온다.
희진이 뛰어내렸을 다리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순간 바람에 모자가 휘날리고 다리 아래로 내려온 그녀는 바위에 걸 터 앉아 시를 쓰려 노트를 꺼내드는데, 그 위로 후드득 비가 쏟아진다. 그녀는 한동안 쏟아지는 비 속에 멍하니 앉아있다.
그 길로 미자는 간병인으로 일하는 중풍 걸린 회장의 집에 찾아간다. 비아그라를 먹고 죽기 전 남자구실을 하고 싶다 외치던 그. 미자는 그 노인의 욕구의 대상이 되어준다. 처연한 얼굴을 하고는. 그리고 며칠 뒤 그 노인에게서 돈 오백만 원을 받아내 합의금으로 지불한다.
이 모든 것들이, 희진이라는 한 소녀의 죽음을 제대로 보고 느끼고 애도하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자신이 행할 수 있는, 혹은 행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행동으로 이어진다.
영화 말미, 결국 미자는 경찰이 손주를 데려가도록 한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아마도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시 낭송회에서 만난 형사와 함께 배드민턴을 치는 그녀.
그것이 마지막이다.
희고 노란 꽃다발과 미자의 시 한 편이 남았다.
< 아네스의 노래 >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 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시를 쓴다는 것
"죽어가죠 시가. 불행히도.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시를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게 될 테니까요." 시가 죽어간다고 한다, 영화 속 김용택 시인의 대사다.
시 강좌에서, 수강생들은 자신의 인생에 아름다웠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들의 아름다웠던 순간은 타인과 눈물과 아름다움이 맞닿아 있다.
할머니와의 추억, 아이의 출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성당에 봄 나뭇잎, 미자의 어린 시절 그녀와 언니에 대해
그리고 아름다웠던 기억은 없었던 것 같다면 운을 뗀 한 남자는 연립 반지하에서 20년 생활하다 6년 전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해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 온 세상이 내것인듯 했던 순간이라 말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무얼까? 시를 쓴다는 것은 타인을, 이 세계를 진정 제대로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시도, 혹은 환대하려는 몸짓, 그런 것이지 않을까? 그것을 우리는 삶의 의미나 가치라고 말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