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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든라이언 Dec 17. 2023

9. 환생, 그 너머

나란히 걷는 선불교

늘 궁금하죠.

전생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건지.


'나는 기억을 못 하는데. 그럼, 다음 생도 있단 말이야? 지금 사는 것도 힘든데...

혹시, 무의식의 조작이 전생이라는 게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건 아닐까?'


일반인들은 보통 하룻밤에 평균 4~5회 정도의 꿈을 꾼다고 니, 저처럼 어젯밤에 꾼 꿈들조차 기억 못 하는 이들에겐 전생을 기억한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하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꿈을 꾸었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전생 같은 것은 없다고 쉽게 단언할 만큼 현생에 겪고 있는 모든 현상이 눈에 보이는 인자들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타고난 천재성과 선천적인 지적장애, 유복함과 가난함, 건강함과 유전병 혹은 희귀 질환, 그리고 평화로움과 전쟁... 좀 더 극단적으로는, 태어나기도 전에 생을 마감하는 경우와 출생할 때부터 왕족의 지위를 갖는 경우. 혹은, 매우 선한 영향력을 주는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데도 안타깝게 갑자기 하늘의 부름을 받는 경우와 이와 반대로 악독한 행을 끊임없이 저지르지만, 긴 세월을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이들까지... 이처럼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른 출발점 단 한 가지 면만 보더라도 한 번의 생으로만 그 인과성을 설명하기 힘듭니다. 그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다양한 희로애락의 경험을 하는 동안 우리는 간명하게 설명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인자들이 숨어 있다는 걸 종종 느낍니다.


오직 단 한 번의 생만 존재하므로 이생을 마감하면 모든 것이 소멸하며 끝이 난다고 보는 주장과 견해를 불교에서는 단견(斷見)이라고 합니다. 단절된 견해 혹은 인과성을 부정하는 짧은 견해로 보는 것인데, '왜 굳이 설명되어야 해? 이것이 세상이고 이치야. 우주 만물 창조의 절대적인 뜻을 우리는 이해할 수도 이해할 필요도 없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극한 인간의 불완전성에 따른 대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그럴 수도 있고 고통으로 가득한 이생을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마음의 발로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분명히 원인과 결과가 분명히 존재하는 인과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오감으로 증명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부분을 아직 수용하고 있지 않을 뿐, 과학도 인과의 법칙을 바탕으로 자연계의 규칙을 연구하고 발견과 발명을 수행하는 학문 분야입니다. 앞으로 만약, 태어나기 전과 사후의 상황도 여전히 인과에 의해 이어진다는 관점을 확대 수용할 수 있는 미래 과학의 빗장이 열린다면, 현재 겪고 있는 상황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보다 능동적인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학, 예술, 학습 혹은 체육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천적으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천재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빛나는 재능에 많은 이들이 놀라워하며 축하하기도 하지만 '왜, 나는 아니지?' 하면서 신의 선택적인 축복을 받은 그들을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만약, 어떤 드라마 주인공이 있어 여러 생을 걸쳐 한 가지 전문 분야에 애를 쓰며 수많은 시간을 노력했는데도 슬프게도 지난 마지막 생에까지는 빛을 보지 못하다가, 드디어 이번 생에는 어린 시절부터 재능이 돋보여, 특별한 전문가의 눈에 들어 발탁되고 그 뛰어난 실력이 세상에 알려져 사람들에게 '천재'라는 칭찬과 함께 존경받는다면, 이 드라마를 보는 동안 시기 질투보다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지켜보다가 마침내 주인공의 빛나는 성공의 순간을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그 분야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존재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기쁨을 주는 것이라면 더욱더 축복받겠죠.


이러한 시각은, 현재의 나의 노력이 지금 당장 원하는 어떤 자리에 이르진 못하지만 불안한 마음 대신, 보다 긴 호흡으로 꾸준히 이어간다면 반드시 성취하는 순간이 온다는 믿음의 힘을 함께 가질 수 있게 해 줍니다. 아니 그럼, 다음 생에 이루어진다는 게 위로가 된단 말이야?라고 당장 반발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이들이 여러 생에 걸친 노력을 한 것을 존중하고 이를 뛰어넘을 만큼의 몰입과 이타행을 실천한다면 이번 생에도 그 뜻을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인과는 분명하니까요.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출발한 현대과학은 분명 마녀사냥과 같은 미신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크게 기여 한 바가 있지만, '마음, 생각 그리고 영혼'등과 같은 형이상학적이고도 비물리적인 현상 그 자체를 비-과학 영역으로 치부하면서, 생각은 오로지 뇌의 작용이라는 극단적 유물론적 사고에 천착하게 되는 또 다른 형태의 미신을 만들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찬성하고 반대하는 그 입장스스로 만든  형이상학적인 [마음]을 근본으로 생겨난 것인데, 마치 어떤 나무에 핀 꽃이 자신을 존재할 수 있게 해 준 줄기와 뿌리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모순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공간을 초월한 마음의 세계를 단지 신경세포들이 만들어내고 부수는 몇 개의 단백질들과 전기적 작용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마치 바닷물을 몇 개의 작은 그릇에 담아보려는 헛된 노력일 뿐이고 진실의 세계에 다가가는 것을 늦출 뿐입니다.


물론, 여전히 전생과 환생 등을 현대 과학으로 증명하거나 드러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온 중 오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색'을 제외한 '수, 상,  행, 식 (제8아뢰야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는 '영혼'의 실제에 대해서도 소위 물질적인, 혹은 물리적인 입증이 힘들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전히 현대과학에서는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영역입니다. (엄밀히는, 영혼도 물리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실제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많은 정황들이 존재합니다. 형이상학적 마음이 물리적인 육체를 움직이는 것은 당연히 이 들 간에 형성되는 에너지적인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최면 심리학이나 정신과학적인 접근방법으로 전생 혹은 환생과 관련된 증거를 제시하는 많은 문헌이나 일화들을 살펴보면 그저 무의식 세계의 조작이나 착각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서술이 구체적이고 분명한 규칙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분들의 시각으로는 얼마든지 정보를 따로 수집할 수 있는 여지나 속임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단순히 기억이나 최면에 의존해 '과거의 정보'를 맞히는 수준으로는 설득의 힘이 좀 모자라는 면이 있습니다.


환생의 현상을 증명하는 데이터의 '양'적인 측면에서 벗어나 환생 한 이들의 정신적인 수준 즉  '질'적인 측면으로 시선을 옮겨보어떤 트릭을 써서 조작할 수 없는 정황들이 있다는 것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세계적으로 높은 영적 존재로 인식되는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티베트의 많은 스승들이 각자의 자비 원력에 따라 다시 티베트의 지도자나 스승으로 거듭 환생하는 현상부터는 그 차원이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은 '업력'에 따라 새로운 육체를 받는 반면 보살들은 중생구제에 대한 높은 정신의 '원력'으로 인해 환생하기 때문에, 태어날 곳과 시기 그리고 환경도 능동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하며, 실제로 태어난 직후에도 이미 그 정신세계의 수준이 매우 높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환생 후에도 이러한 수준을 철저히 감추고 있는 한 일반인들은 전혀 알아차릴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언제든 확보할 수 있고 조작 가능한 '정보'를 단순히 맞히는 정도가 아니라 성인 불교 전문가들도 알기 힘든 깊은 불법의 뜻까지 이해하는 전생의 '지혜'가 그대로 이어져 다음생으로 넘어오는데 이를 [저절로 아는 자 (生而知之者, 생이지지자)]라고 합니다.


선종의 역사에서는 이런 '저절로 아는 자'에 해당하는 많은 주인공들이 존재합니다만, 가장 널리 알려진 다음 두 분의 선사님들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선, 조주종심(趙州從 77 8~897) 선사는 산동성 조주부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학씨이며, 120세의 수복을 누리면서 중국 선풍의 황금기를 개척한 분으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과 ‘뜰 앞의 잣나무,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와 같은 유명한 화두를 남긴 위대한 조사입니다. 다음은 2020년 2월 8일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 동안거 해제법어 전문 중 발췌 한 내용입니다.


[한 노승(老僧)이 10세 미만의 동자승(童子僧)을 데리고 남전(南泉) 선사를 친견하러 왔다. 노스님이 먼저 남전 선사를 친견하고 청(請)을 드리기를, 제가 데려온 아이가 아주 영특한데, 저로서는 저 아이를 훌륭한 인재로 키울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스님께서 크신 법력(法力)으로 잘 지도해 주십시오. 하고는 물러 나와서 동자승을 조실 방으로 들여보냈다.


동자승이 인사를 올리니, 남전 선사께서는 누워 계시던 채로 인사를 받으며 물으셨다.

- 어디서 왔느냐?

-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

- 서상원에서 왔을진대, 상서로운 상(像)을 보았느냐?

- 상서로운 상은 보지 못했지만, 누워 계시는 부처님은 뵈었습니다.


남전 선사께서 누워 계시니 하는 말이다.

남전 선사께서 이 말에 놀라, 그제야 일어나 앉으시며 다시 물으셨다.

- 네가 주인이 있는 사미(沙彌)냐, 주인이 없는 사미냐?

- 주인이 있습니다.

- 너의 주인이 누구인고?

- 스님, 정월이 대단히 추우니 스님께서는 귀하신 법체(法體) 유의하시옵소서.


그대로 아이 도인이 한 분 오신 것이다. 남전 선사께서 기특하게 여겨, 원주를 불러 이르셨다.

이 아이를 깨끗한 방에 잘 모셔라.

부처님의 이 견성법(見性法)은 한 번 확철(廓撤) 히 깨달을 것 같으면, 몸을 바꾸어 와도 결코 매(昧) 하지 않고, 항상 밝아 그대로 생이지지(生而知之)이다. 이 사미승이 바로 ‘조주고불(趙州古佛)’이라는 조주스님인데, 이렇듯 도(道)를 깨달은 바 없이 10세 미만인데도 다 알았던 것이다. 조주 스님은 여기에서 남전 선사의 제자가 되어 다년간 모시면서 부처님의 진안목(眞眼目)을 갖추어 남전 선사의 법(法)을 이었다. 


출처 : 불교언론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다음은, 세 번의 생에 걸쳐 학인을 지도하신 것으로 유명한 오조 홍인(弘忍, 601~675) 선사님.


중국 선종(禪宗)의 제5조이며 후베이성[湖北省] 황메이현[黃梅縣] 출생. 7세 때 제4조 도신(道信)을 따라 출가하여 51세에 대사(大師)가 되었다. 옛날, 중국에 달마 대사(達磨大師)로부터 선법이 전해져 오다가 사조 도신(四祖道信) 선사에 이르렀는데, 도신 선사는 팔십에 가깝도록 눈 밝은 제자를 두지 못하셨다. 그래서 도신 선사께서 고심(苦心)하고 계시던 차에, 하루는 당신보다도 더 연로(年老) 한 한 노승(老僧)이 찾아와서 예배(禮拜)를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스님의 고귀한 법(法)을 잇겠습니다."

그래서 도신 선사께서 여러 가지 부처님 진리의 법을 물어보시니, 노승은 하나도 막힘이 없이 척척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법(法)에는 계합(契合)이 되었으나 나이가 너무 많은지라,

"그대가 부처님의 진리의 법은 바로 알지만 너무 연로(年老)해서 법을 부촉(付囑)할 수 없으니 가서 몸을 바꾸어 오게. 그러면 그때 가서 법을 전해 주겠네."
하고 도신 선사께서 말씀하셨다.


노승은 소나무 한 그루를 도신 선사의 방 앞뜰에 심어 신표(信表)를 해놓고는 떠났다.

산 아래 마을에 이르니, 마침 한 처녀가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어서, 노승이 처녀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면서 물었다.

"하룻밤 묵고 갈 수는 없겠는지요?"

"집에 어른들이 계시니 여쭈어 보면 쉬어가실 수 있을 겁니다."

처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노승은 거기에서 그만 몸을 벗어 버리고 처녀의 뱃속에 들어가 잉태(孕胎)되어 버렸다.  그러고는 세월이 흘러, 처녀의 배가 불러오자 집에서는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 애를 가졌으니 남부끄럽다고 쫓아내 버렸다. 그러나 도인을 잉태하고 있는지라 가는 곳마다 흔연히 밥을 주고 잘 곳을 내주었다.


그렇게 열 달을 지내다가 출산(出産)하였는데, 처녀는 너무나 분하고 억울해서 아기를 낳자마자 강가에 내다 버렸다. 그러자 물오리들이 수십 마리 모여들어 아기를 감싸서 보호하니,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는 아기를 구해서 어머니를 찾아 데려다주었다.

아기를 버린 후부터는 어디를 가도 밥은커녕 잘 곳도 구하지 못하다가, 아기를 다시 거둔 후로는 또 어디를 가나 흔연히 밥을 주고 잘 곳도 내어주므로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아이는 다섯 살이 되자 어머니에게 하직인사를 올리고는 옛날 도신 선사를 찾아갔다.

"재송(栽松)이가 왔습니다."

"무엇으로 그대를 인정할꼬?"

"저것으로 증명합니다."
하며 아이는 방 앞의 소나무를 가리켰다.


이 분이 바로 홍인(弘忍) 선사로, 이렇게 해서 도신 선사로부터 법을 이어받아 동토(東土)의 전등(傳燈) 제 오조(第五祖)가 된 것입니다. 이어 살펴보겠습니다.


홍인선사는 동산(東山)에 살았기 때문에 그 교단을 동산법문(法門)이라 칭하였는데, 700명의 제자를 가르쳐 크게 선풍(禪風)을 선양하였다. 달마(達磨)·혜가(慧可)로 시작되는 중국 선종의 실제적인 확립자로서, 혜능(慧能, 훗날 육조(六祖)에게 법을 전하시고, 열반에 드실 즈음에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열반(涅槃)에 들거든 육신을 화장시키지 말고 그대로 조사전(祖師殿)에 안치해 두어라. 내가 다시 몸을 받아올 때에는 그 전생신(前生身)이 한 손을 들 것이다."

이 유언에 따라 오조 홍인 선사의 육신은 열반 후에도 화장하지 않고 오조사(五祖寺)의 조사전에 그대로 모셔졌다.


그로부터 삼백여 년이 흘렀다.


오조 법연(五祖法演, 1024~1104)은 사천성(四川省) 면주(綿州) 파서(巴西) 사람으로, 속성은 등(鄧)씨이다. 법연은 소년 시절에 출가해 35세에 수계를 받았다. 성도(成都)에 머물며 백법(百法) 및 유식을 공부하였다. 이후 십여 년간 여러 지역을 유력하며 발초첨풍하였다. 그러다 법연이 백운 수단(白云守端, 1025∼1072)을 만나 수단에게서 마니주 화두로 대오하고 수단에게서 법을 얻어 임제종 양기파 법맥을 이었다.


한편, 호북성(湖北省) 오조사(五祖寺)에서 하루는 부전 스님이 예불(禮佛)하러 조사 전에 갔다가 오조 스님의 한 손이 들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즉시 대중에게 알렸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와 전설처럼 되어 버린 이야기가 눈앞에 현실로 나타나자, 모든 대중이 들떠서 선사를 맞을 준비를 해놓고 가사 장삼을 수(垂)하고 기다렸다. 과연, 한 노승(老僧)이 왔다. 바로, 법연(法演) 선사이다. 선사는 법당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조사전으로 들어가더니 오조 선사의 형상(形相) 앞에 섰다.

"옛날에 이렇게 온몸으로 갔다가 오늘에 이렇게 다시 왔으니, 그대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대를 아노라. 무엇으로 증명할꼬?"

향(香)을 하나 꽂으며,

"이것으로 증명하노라."
하셨으니, 법연(法演) 선사는 자신의 전생신(前生身)에게 다시 돌아왔음을 이렇게 스스로 증명하였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전해져 온다.


蕭蕭白髮下靑山
八十年來換舊顔
人忽少年松自老
始知從此落人間


쓸쓸히 백발인채 청산을 내려가서
팔십 먹은 옛 얼굴을 바꾸고 돌아오니
사람은 소년이나 소나무는 늙어있네
이로부터 세상에 다시 옴을 알았구나


오조 홍인 선사께서 열반에 드신 지 삼백여 년이 지난 후에 몸을 바꾸어 와 오조산(五祖山) 법연(法演) 선사로 선법(禪法)을 크게 펼치셨던 것이다. 법연은 이곳에 오래 머물며 선풍을 진작해 선종사에서 그를 ‘오조五祖 법연’이라 한다.


이렇듯 오조 선사는 조사(祖師) 문중에 삼생(三生)을 몸을 바꾸어 오신 위대한 도인이셨다.


[출처: 해운정사 오조 홍인(五祖弘忍) (601∼674) 편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이 두 분뿐만 아니라 많은 선사님들이 여러 생을 거쳐 수행해 왔음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육조 혜능(六祖 慧能) 선사는 가난한 나무꾼으로서 시작해 육조의 지위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문자를 읽지 못하였지만, 불교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돈오법을 제창하며 남종선의 선풍을 드날렸습니다. 훗날 제48조 원오 극근(圓悟克勤) 선사는 원오록(圓悟錄) 찬육조게(讚六祖偈)에서 「육조는 진실로 고불(古佛)이시니 정례(頂禮)하옵니다. 육조께서는 80 생 동안 선지식이 되셔서 세속의 글자는 모른다고 나타내 보였지만,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해도 이치에 맞고 조리가 서며 불법의 굴을 꿰뚫었습니다.」로 기록한 한 바 있습니다.


이렇듯, 단순히 생을 유전하는 수동적인 '윤회'의 수레바퀴에 갇힌 틀을 뛰어넘어 생과 사를 자유자재하는 선사님들의 행적은 어디에 무엇이 있고 나는 누구와의 어떤 관계였다는 정보를 맞히는 정도의 일반적인 환생의 사례들과는 분명한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주의할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예시들을 보며 '그럼 다음 생이 있다면 나는 계속 몸을 바꿔가며 영원을 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단견'과 마찬가지로 영원불멸한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상견(常見)' 또한 옳지 못한 견해로 보기 때문에 단순히 여러 생으로 이어진다고 해서 고통을 벗어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견해 모두 오온의 집착에 따른 착각에 불과한 것이므로 결국 이렇게 머무르는 마음은 결국 육도윤회의 수레바퀴에 힘을 더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신중하게 알아보고 가야 합니다.

어떤 길을 걸을지.

그리고 날카롭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무엇이 있는지.


환생,

그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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