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나는 나를 바꾸기로 했다.
마흔, 처음 꿈을 꾸다.
마흔이다. 아니다. 정확히는 서른아홉. 학교를 일찍 들어간 죄로 39이라 말해야 할지 40이라 말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마흔이다.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나이를 탓할까 83년생인 척하는 빠른 84년생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세상은 모난데 없이 살아야 한다.
그 말을 진리인 양 살아온 인생은 어찌 보면 평탄하고, 달리 보면 굴곡진 기록이다.
초등학교 6학년에 부모님이 이혼하고 1년간 할머니 댁에서 살기도 하고, 재혼가정이 되었다. 다단계도 경험하고 친한 친구도 잃어봤다. 자취방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반지하 방이 이런 거구나 느낀 적도 있다. 버스에서 내리다 오토바이 뺑소니도 당해봤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나쁜 사람이 된 비겁한 순간도 많았다. 거절하지 못해 도를 아십니까를 따라가 멘털이 나간 상태로 돈도 잃고 절도 해봤다. 돈이 필요할 때만 연락을 하는 지인도 있었고, 거절로 관계를 정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탄하다 평하는 이유는 사람 때문에 힘이 들고, 사람 때문에 하루를 버틸만했다는 것. 결국에 기억에 남는 것은 좋은 사람들이다. 원망하는 마음으론 세상을 버티기 힘들었다. 기억은 왜곡되고 감정은 희석된다. 미화된 기억만이 나를 살게 했다. '이만하면 괜찮았다.', '이 정도면 잘 살았다.' 스스로 이런 평가라도 해야만 살 것 같았다.
속상한 마음도, 억울한 마음도 웃음 뒤에 숨겨본다. 나이와 함께 새겨진 주름이 내 인생을 대변할까 봐. 울퉁불퉁한 인생이 얼굴에 붙을까 봐. 나이 든 내 얼굴에 서러운 마음이 들까 웃는 주름이 붙길 바랐다. 사실은 주름 같은 건 없길 바랐는데 내 나이가 벌써 마흔이다.
뭐하나 이룬 것도 없는 것 같은 맘에 초조해진다. 한 해가 저물어 감에 마음만 바쁘다. 어릴 때는 대접받고 싶고 얼른 왔으면 했던 생일도 늘어가는 초 개수에 입맛이 씁쓸하다. 아이가 커가는 것만 생각하고 내가 나이 들어가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나? 매년 돌아오는 생일과 12월 31일은 나이를 실감한다. 택배라면 반품이라도 할 텐데.. 반품조차 안 받아준다.
마흔이라는 나이면 뭐든 쉬울 줄 알았다. 지혜롭게 세상을 대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불안하고 두렵고 오히려 더 조심스럽다는 것도 이제 안다. 이제야 깨닫는다. 내 부모님도 나와 같았겠구나.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되어 부모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버거웠을까. 김가네 똑똑한 척은 다하던 첫째 딸은 겪어봐야 깨닫고 세상을 알아간다. 내 상처 못지않게 그들도 아팠겠구나. 이해하는 중이다. 감당하기 어려웠던 아픔에 혼자 울며 홀로서기해야 했던 아이는 자라 세 딸의 엄마가 되었다.
첫 아이가 어느 날 내게 묻는다. "엄마는 꿈이 뭐야?" 왜 말문이 턱 막히는지. 먹고살기 바빠 꿈같은 건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른도 꿈이 있어야 하나? 아이에게 답할 수 없는 대답을 골라내다 말문을 돌렸다. 마흔이란 나이에도 꿈이 필요한 건가. 아이의 물음은 내게 고민거리를 안겨줬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내 꿈은 무엇인가?
나는 내 아이에게 어떤 부모로 기억되고 싶은가?
나만 챙기면 되던 나이에서 내가 꿈꾸던 것은 남들처럼 평범한 삶이었다. 튀지 않게 적당히 행복하기. 굴곡진 인생이 티 나지 않게 평범하게 살기였다. 내 꿈은 그냥 평범함이었다.
아이의 질문 이후로 나는 내 꿈에 대해 생각해봤다. 하지만 여태껏 꿈꿔온 적이 없는데 갑자기 찾을 수 있을 리가. 무작정 새벽 기상을 해봤다. 처음 꿈을 찾기 위해 한 것이 필사 책이라서. [새벽 5시 필사 100일의 기적]이라는 책 제목을 보니 새벽 5시에는 일어나 써야 할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책 제목에 새벽이 많은지... 체력이 부족한 나는 새벽 병든 닭이었다.
새벽 기상이 너무 힘들었다. 꿈은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시작한 초보는 꿈도 새벽도 낯설었다. 무작정 시작한 새벽 기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는 것도 금방이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좀 편하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포기하란 마음의 속삭임이 커져갔다. 나는 왜 이렇게 포기가 쉬울까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이유를 찾아나갔다.
어렵던 새벽 기상을 통해 나는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들었다. 눈뜨는 시간부터 잠이 들 때까지 아이와 함께 먹고 놀고 자는 난 아이가 없는 시간도 온전한 내 시간이 없었다. 엄마도 아내도 며느리도 아닌 나의 시간은 새벽뿐이었다.
그 새벽 [사양합니다, 착한 사람이라는 말]의 원고를 쓰며 나는 나를 처음 돌아봤다. '포기하면 편해.'라는 내 마음의 시작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환경을 포기하는 것이 더 쉬웠다. 나약한 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다.'란 말로 나를 단념시켰다. 포기가 익숙해진 나는 어쩔 수 없는 비겁한 도망자였다. 그리고 끝까지 외면만 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제야 나는 용기를 낸다. 상처받을 수 있다는 용기를.
내 바닥을 보고, 아물지 않았던 내 상처를 드러내고, 내 과거를 보여주며 나는 이제야 꿈을 꾼다. 마흔, 나는 나를 바꾸기로 했다. 더 나은 나를 꿈꾸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