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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수나무숲 Jun 13. 2023

맛의 모양

제법 맛있었던 모양이다.


나름 "맛있게" 요리하는 건 자신 있다.
간을 잘 맞추고 굳이 계량하지 않아도 눈대중으로 봐도 어느 정도 어떤 맛이 날지 예상이 된다.

다만 내가 자신 없는 부분은 "모양"


미술을 전공하고 그림 그리고 화실도 운영했고

아나운서, 쇼호스트로 대중 앞에 서고... 늘 보이는 것에 집중해온 사람이다 보니
나의 요리 모양새가 그다지 아름답지 않으니 선뜻

"저 요리 잘해요!"라는 말이 안 나온다

그래서 요리 관련 이야기나 질문이 나오면

 "제 요리 맛은 좋아요!"라고 말해버린다.


어렸을 적 늘 따뜻하고 맛있는 엄마의 집밥을 잘 받아먹고 곁에서 눈대중으로 엄마가 요리하는 모습을 잘 봐온 터라 중간중간 잘 정리하며 요리하는 엄마의 깔끔함, 엄마가 따로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신기하게 터득해 버린 간 맞추기는 소중한 유산으로
잘 받았으나 엄마가 해내는 정갈하고 예쁜 요리의 모양새까지는 다 받지 못했다.

엄마의 요리 스타일 중 가장 감사하게 물려받은 건 빠른 손이다.

요리 맛도 맛이지만 나는 요리하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그래서 특별히 육수를 우려내야 하는 요리 외에는 생각보다 단시간 내에 뚝딱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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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집에 즐겁게 놀러 갔다가 미끄러운 신발 바닥 탓에 길바닥에서 크게 넘어진 엄마는 무릎에 실금이 갔다.

이모집으로 내려갈 땐 두 발로 즐겁게 간 엄마가 집으로 돌아올 때는 이모와 이모부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부산에서 대전까지 먼 길을 오는 이모와 이모부 성격상 집에 들렀다 가지 않고 엄마만 내려주고 바로 떠날 것 같았다.

"차 안에서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뭘까?!"

요즘 머리를 잘 쓰지 않은 탓에 창의적인 생각이 떠오르지 않고 소풍 때 늘 엄마가 싸줬던 김밥과 유부초밥만 생각났다.


좋은 세상에 태어난 나는 앱을 통해 20분 만에 식재료를 배송받아 엄마가 만들어줬던 김밥과 유부초밥을 떠올리며 뚝딱 만들어냈다.

물론 남편도 보조 역할을 톡톡히 했다.

곧 결혼 7주년이 되다 보니 진짜 손발이 잘 맞는다.
내가 양파와 당근을 썰고 있으면 남편은 계란 지단을 위한 계란을 열심히 깨고 휘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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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끓으면 시금치를 넣고 데치고 그와 동시에 양파와 당근을 팬에 볶고 다른 냄비에는 소고기를 볶는다.

엄마의 김밥에는 꼭 다짐육이 들어갔다. 언제나 좋은 재료 쓰는 엄마를 보고 자란 터라 한우로 선택했더니 내가 만든 김밥의 단가가 꽤 올라갔다.

유부초밥, 김밥 재료를 동시에 손질하면서 남편과 급하게 요리하는 시간이 나는 꽤나 즐거웠다.

"오빠! 우리 김밥 장사할까?"

남편은 계란물을 팬에 부으며

 "마진을 남기려면 이 김밥은 한 줄에 만 원 이상 받아야겠는걸?"이라고 현실을 알려줬다.

마음 같아서는 10만 원짜리 김밥을 싸주고 싶었다.

전복도 넣고 스테이크도 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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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김밥에는

김밥 햄, 단무지, 우엉, 시금치, 계란지단, 다진 소고기 볶음이 들어간다. 어린 시절 엄마가 해준 김밥과 얼추 비슷하다.

그리고 유부초밥에는
당근 양파, 다진 소고기를 밥과 함께 볶아 간을 한 것을 삼각 모양 유부에 꾹꾹 눌러 담는다.
유부초밥에 동봉된 소스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 유부초밥은 초등학교 때 내가 정말 좋아한 소풍 음식이었다.
고기가 듬뿍 들어간 유부초밥과 꿀이 뿌려진 딸기 후식까지.

지금 생각하면 나의 어린 시절은 정말 호사스럽다.


추억에 잠겨 김밥을 말았다.

재료 준비며 김밥에 들어가는 밥 밑간까지 다 쉽다.

그런데 김밥을 예쁘게 말아내는 게 제일 두렵다.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얼마나 있는 힘껏 터지지 않길 염원하며 한 줄 한 줄 말았는지 모른다.

어찌어찌해서 말리긴 했는데 모양이 영... 성에 차지 않는다.

오늘을 위해 다이소에서 구비한 참기름 칠하는 붓으로 말아진 김밥 위에 참기름을 발라줬다.

'터지지 않고 잘 썰어야 할 텐데...'


내 속마음도 모르고 김밥을 썰면 한 줄에 꼭 한 두 개는 터져버린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가 사랑하는 세 사람을 위한 도시락을 가득 채울 만큼의 김밥은 확보했다.

유부 옆구리가 찢기고 중간에 터져버린 김밥은 남편과 나의 입속에 들어가거나 추후에 먹을 식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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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로 멀쩡히 서있던 엄마는 한쪽 다리에 붕대를 감고 목발을 짚고 차에서 내렸다.
엄마를 부축하며 이모에게 내가 만든 도시락을 건넸다.
혹시나 이동 중에 김밥이 터져있을까 봐

"모양은 별로인데 맛은 좋을 거야!"

좌) 쉼표 모양 김밥 & 우) 아슬아슬 유부초밥

라고 미리 알려줬다.


이모는 부산까지 가는 먼 길 차 안에서 이모부랑 맛있게 나눠먹었다고 했다.

정말 맛있다며 행복한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엄마 집으로 와서 조심스레 열어본 엄마를 위한 김밥도 감사하게 흐트러지지 않았다.

엄마는 김밥 하나를 입에 쏙 넣더니

"엄마가 만든 것보다 맛있네!"라고 했다.

SNS에 올려진 화려한 모양의 김밥들과 비교하면 내 김밥은 모양새가 너무 소박했던 터라 나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양이 뭐가 중요하니 맛이 중요하지"

깁스를 한 낯선 엄마가 맛있게 먹는다.


내가 만든 어설픈 모양이 맛있는 모양으로 바뀌어서 엄마 몸에 들어간다.


내가 이런 맛에 요리를 하나보다.

다만 보이는 것에 집중하고 싶지 않은데 쉽지가 않다.


한 번 더 이모가 엄마에게 너무 맛있었다고 연락 왔다고 했다.




비뚤어진 모양인 줄 알았는데

내 김밥은 맛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제법 맛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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