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의 간극

꿈의 언저리에 위치한 사람

by 단비


아득히 먼 과거, 나도 꿈이란 게 있던 때가 있었다. 학창 시절 나는 줄곧 의사를 꿈꿨으나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선 의사란 직업은 단순히 내가 되고 싶다 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아주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란 현실을 깨달았다. 공부 머리의 한계를 인정한 후 나는 의사가 못 된다면 그 근처라도 가야겠단 결심과 함께 대학 진로의 방향을 틀었다.


어린 나이에도 워라밸의 중요성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기에 힘들다고 소문이 자자한 간호사는 되고 싶지 않았다. "물리치료사도 너무 몸을 많이 써야 하니 힘들지 않을까? 약사는 대학을 왜 이렇게 오래 다녀야 하는 거지..?" 병원에서 일하는 온갖 직업을 재고 따지고를 반복하던 중 적당히 안 힘들고 적당히 멋져 보이는 "임상병리사"라는 직업을 발견했다. (S.. T.. A.. Y....)


대학 생활은 나름 즐거웠다. 원하던 대로 임상병리학과에 입학하여 조직학, 진단혈액학, 분자진단학 등의 전공과목을 공부하는 건 힘들긴 했지만 재미가 훨씬 컸다. 어서 빨리 배운 지식들을 업무에 적용해보고 싶어 취업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그 당시 내가 상상했던 임상병리사의 모습은 이렇다. 많은 혈액 튜브들 사이에 앉아 고글을 쓰고 스포이드로 혈액을 채취하여 알 수 없는 검사들을 진행하고 가끔은 현미경도 봐주고, 또 가끔은 멋진 보호복을 입고 음압방에 들어가 알 수 없는 검사를 하는 모습들. 우아하고 전문적이고 멋진 그런 모습들 말이다.


상상은 맞는 것도 있었고 완전히 틀린 것도 있었다. 틀린 것은 조금 많았다. 대학교 3학년이 되어 병원 실습에 나가 실제로 마주한 임상병리사의 업무 환경은 꽤나 당황스러웠다. 병원에서 가장 많은 수의 임상병리사가 근무하는 진단검사의학과의 풍경은 마치 공장의 한복판 같았다. 수십 명의 임상병리사들이 자신의 덩치의 두세 배는 가뿐히 넘어 보이는 검사 장비들에 둘러싸여 스포이드를 만지작 거리는 대신 키보드와 마우스를 달각댔다. 혈액은 자동화 장비를 통해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알아서 검사 장비로 들고 나왔다. '움치기 움치기' 끊임없이 소음을 일으키는 자동화 장비들 사이에서 검사 결과 언제 나오나요, 따위의 질문으로 가득 찬 전화가 쉴 새 없이 울리는, 백색 소음으로 치기엔 상당히 거슬리는 소음들로 가득 찬 공간 속에서 기계처럼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내가 상상한 전문직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실제로 진단검사의학과에 취직하여 근무해 보니 학생 실습 때 느꼈던 만큼 검사실이 마냥 회색, 잿빛, 뭐 기계 같은 그런 공간은 아니었다. 여기도 다 사람 사는 동네(?)인 만큼 가끔은 활기차고 가끔은 다급하게 돌아가고, 또 가끔은 조용히 각자의 업무에만 집중하기도 하는 여느 직장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곳이다. 다만 병원이라는 약간의 특수성이 있는 곳이라는 점이 조금 다를 뿐.


실습할 때도, 임상병리사로 직접 일하고 있는 지금도 동일하게 공감하는 것은 임상병리사의 주된 업무가 대학에서 배운 지식들을 접목시킨 업무라기 보단, 결국엔 거대한 검사 장비들을 "어르고 달래" 일한다는 것이다. 이 무지막지하게 큰 장비들이 멈춰버리면 검사실 역시 멈춰버린다. 하루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도 장비 문제로 검사가 지연되면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환자들의 모든 진료가 지연되기 때문에 우리는 장비가 심통 부리지 않길 바라며 조심스러운 손길로 일했다.


실상이 이렇다 보니 나는 가끔 내가 거대한 공정 속 거대한 장비의 작은 부품, 또는 윤활유 정도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란 생각을 한다. 쉴 새 없이 '움치기 움치기' 돌아가는 장비들에 둘러싸여 이 지리멸렬한 시간을 견뎌내는 일은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 누가 하더라도 충분히 잘 굴러갈 것만 같다.


비록 의사는 되지 못하더라도 아픈 사람들을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 비슷한 마음으로 취업한 병원 생활은 내 멋진 꿈의 언저리에도 가 닿지 못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내 흉통이 꽉 찰만큼 거대했다. 병원에만 출근하면 빠듯한 흉통의 공간 때문에 숨 쉬기가 벅차다. 20대의 나는 이 숨 막히는 삶을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 매일밤 잠들기 전 가늠해보곤 했다.


나 계속 임상병리사로 살아가는 게 맞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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