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 vs 자유
"30억! 순자산 30억이면 경제활동을 그만두겠다."
두 번째 직장에 들어가면서부터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가수 박진영이 오래전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시작이었다. 그는 가수생활을 시작하며 10억을 목표로 정했다고 했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필요한 돈이 그 정도이며, 목표를 달성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다는 뜻이었다. 박진영은 그렇게 다짐하고 1~2년 만에 목표한 돈을 벌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 일화에 자극을 받아 나도 생각을 해 보았다. 결혼을 해서 두 아이를 낳고 4인 가족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필요할까. 식비, 학비, 주거비, 자녀 출가 등을 생각해서 도출한 금액은 30억이었다. 30억이 있으면 더 이상 경제활동이 없어도 내가 원하는 수준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목표가 달성되었을 땐 뒤도 보지 않고 직장을 벗어나리라 다짐했었다.
경제적 자유라는 개념은 코로나를 맞이한 2020년 급격하게 증가했다. 전 세계에 어마어마한 유동성이 풀리며, 모든 자산의 가치가 급등했다. 실상은 화폐가치가 떨어진 것이었지만, 어찌 됐든 부동산, 코인, 주식 등 재테크를 통해 너도나도 파이어를 외쳤다. 파이어는 Finance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준말로 젊은 나이에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재테크 분야에선 졸업이라는 용어도 많이 사용했다. 내 주변에도 졸업을 선언한 사람이 있었다. 코인으로 100억대 부자가 된 그 사람은 아주 깔끔하게 졸업을 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그에게 자극받아 뒤따라간 사람들은 모두 손실을 봤다. 그 손실액이 100억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산가치 급등시기에는 나도 자신감이 넘쳤다. 거주 중인 아파트의 가격은 급등했고, 해외주식도 급증했다. 당시 육아휴직 중이었는데, 근무를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파이어까지 가보자고 생각했다. 10년 안에 30억이 되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불과 2년 만에 모든 것은 사라졌다.
아파트는 산 가격 이하로 떨어졌고, 해외주식은 손실을 안은채 무지성으로 보유 중이다. 코인은 진작에 박살이 나서 -90%이다. 복직을 하고 다시 월급을 받기 시작했지만 자산은 실시간으로 녹아내렸다. 다음 육아휴직도 기대했지만 무기한 연기되었다. 오히려 연차도 줄여야 할 판이다. 이제 일을 하지 않으면 카드대금과 원리금이 감당이 되지 않는다.
온라인에도 오프라인에도 소멸해 버린 파이어족들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다. 2년 전에는 불과 5억이나 10억의 자산으로 파이어를 선언한 사람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과연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을까. 그 사이 물가는 올랐고 실물자산의 가치는 떨어졌다. 정확히는 몰라도 상당히 불안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이미 재취업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도 직장인으로서 당연히 직장 욕을 많이 하고 산다. 직장은 어떻게든 우리를 통해 수익을 뽑아먹고, 자신들의 이득분을 떼어놓은 채 우리에게 돌려준다. 태생이 착취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안정을 부여해 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직장이란 조직의 톱니바퀴가 되는 순간 자유를 잃고 안정을 얻는다. 지금 같은 경제 위기 상황에선 안정이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자유를 선언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근로전선에 뛰어들고 있다.
30억의 목표는 바뀌지 않았다. 첫 다짐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목표가 상향되지도 하락하지도 않았다. 꽤나 적절한 금액을 설정했는 것 같다. 그리고 반드시 달성하리라 믿는다. 그 목표 달성을 위해 직장인이란 지금의 나의 위치가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로나 시절 나도 사업을 해보고 싶어 카페를 알아본 적이 있었다. 만약 그때 보증금을 지급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족의 안정을 걱정하며 아주 많은 고민과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아마 브런치 작가도 되지 못했을 것 같다.
파이어나 졸업을 외치며 사표를 던지기 전에 꼭 한번 스스로를 돌아보자. 지난번에도 적었지만 퇴사는 수백, 수만 가지의 시도 후에도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