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Roland 20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인 Jun 28. 2024

5월 4일 이리오모테 섬

쌤과 나는 트레킹을 위해 이시가키 섬에서 이리오모테 섬으로 넘어갔다. 리타와 마이클은 오늘 여유롭게 있고 싶다며 이시가키 섬에 남았다. 이리오모테 섬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나는 어제 갑자기 상기된 사건에 계속 머물렀다. 피해자는 사사로운 부분까지 이야기하는 게 어렵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절대 가해력을 이해시킬 수 없다.


은우는 나를 진정시키고 다시 카페에 들어가 그 사람에게 상황을 설명할 것을 그리고 내게 사과할 것을 정중히 요구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설명할 능력이 없었다. 그 사람은 성인 남성의 겉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본인 대신 그의 보호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기계적으로 고개를 반복적으로 숙여가며 “죄송합니다. 모릅니다. 제 아들은 아픕니다. 죄송합니다.”라고만 말했다고 은우가 전했다.

은우는 그 사람의 행동 그리고 그 보호자의 말과 의사소통 방식으로 감히 추측을 해 보는데, 두 사람 모두 어떤 종류의 발달장애를 겪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사건에서 나는 어떤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일까. 그는 가해자인 걸까. 나는 떳떳이 피해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시가키와 이리오모테 섬은, 섬 전체가 국립공원이다. 피네이사라 폭포를 둘러싼 산을 트레킹 하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그 유명세에 비해 가는 방법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정보도 제한적이었고 그 마저도 정확하지 않아 우리는 당황했다. 쌤과 나는 내려야 할 정확한 버스 정류장을 몰랐고 눈치껏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내려서 숲의 입구로 보이는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무가 우거졌고 흙은 눅눅했으며 나무가 빽빽해 해가 들지 않아 선선했다. 길이랄 것은 없었고 그나마 발자국으로 보이는 흔적을 따라갔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거대한 수로관위를 걷고 있었다. 그것이 수로관인줄 모를 정도로 많은 나뭇잎과 흑으로 쌓여있었다. 어느 순간 자신의 자취를 드러냈을 때에는 땅에서부터 꾀 높이 떨어져 있는 수로관 위를 기고 있는 우리가 있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하늘이 보일 것도 같았지만, 이렇게 수로관위를 기어가는 것이 불법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다른 길을 찾기 위해 내려왔다. 마침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한참을 걸으니 작은 폭포가 있었다. 우리가 목표하고 있었던 피네이사라 폭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도착지를 찾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우리 둘은 직감했다. 적당히 물에 잠기지 않은 바위를 찾아 않았다. 다섯여섯명의 사람들은 나무에 줄을 매달아 그네를 타고 수영을 하며 즐겁게 웃음꽃을 피웠다. 점심으로 도시락을 꺼내먹었다. 구글맵을 켜보았지만 위치가 잡히지 않았다. 정상으로 가는 길이 없었다. 사실 어디로 가는 길도 없었다. 

“여행 중에 하루정도는 꼭 등산을 하고 싶었는데.” 나는 실망감에 한숨을 쉬며 말했다. 

“Plans can change.” 그가 덤덤히 말했다.

결국 우리는 들어왔던 입구를 겨우 찾아 나왔다. 도로변에 나왔을 때 온갖 가지들로 인해 나의 팔과 다리에는 잔상처가 나있었고, 신발은 흙으로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져있었다. 시간은 네시정도가 되었고 버스 정류장을 보니 세시가 막차였다. 이시가키섬으로 돌아가는 항구까지는 걸어서 두 시간이었다. 아무 말 없이 버스 시간표에서 눈을 떼고 서로를 한번 쳐다본 뒤 큰 대로변을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가끔은 인도가 없어 차들이 우리를 삥 둘러 지나가야 했다. 하지만 대체로 차가 많이 않았다. 

“I dare you to lie down in the middle of the road.” 나는 농담 삼아 말했다.

그는 한번 픽 웃어보더니 배낭을 내려놓고 한달음에 도로 정중앙에 들어 누워버렸다. 진짜로 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나는 놀란 표정으로 어서 일어나라 했다. 그는 팔다리를 넓게 펼치며 대자로 누워 일어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크게 웃었다. 그도 크게 웃었다.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때 주변이 숲뿐이었던 여태까지와는 다른 게 조금 번화가가 보였다. 우리는 아무 음식점에 들어가 테라스석에 앉았다. 음식을 주문하고 잠자코 기다리는데 쌤이 갑자기 가방에서 장난감 수갑을 꺼냈다.

“Didn’t know you were into those.”

“Yeah.” 

“Wait, really?”

“Yeah, I mean I’m not gonna lie. I have been very sexually active and also very explorative.”

“Yeah?”

“Yeah. You have no idea.” 

“All right then. What’s your body count?” 나는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핏 웃으며 장난 삼아 물었다.

“On a count of three, we say it?”

“Okay, why not.”

“Probably over 300.”

“Four, uh, what? You know what body count is, right? Or am I mistaken?”

나의 반응에 본인도 당황했는지, 

“Uh, yeah.” 나는 경악을 숨기지 못해 이어갈 말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그에 대해 의아했던 것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카페인, 알코올, 니코틴에의 강한 의존. 기분의 급격한 변화. 감정을 무디게 하려 함. 현실세계에서 떠도는 것 같음. 혼자 있고 싶어 함. 과도한 친절함과 사과. 

그리고 즉흥적이고 위험한 성적 해소. 

나는 또 다른 단서를 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그는 멋쩍은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채식주의라고 하면 사람들이 걱정하더라고. 웃기지, 누구보다 성적으로 활발한데.”

“그러게. 나도 왠지 그런 선입견을 갖고 있었네.” 생각해 보니 나도 그 사건이 있은 후 한동안 고기를 먹지 못했다. 어떤 욕구의 대상이 되는 것도, 욕구의 행위자이고 싶지도 않았다. 양쪽 다 고깃덩어리만도 못한 것 같았다.

그는 갑자기 자신의 오른손과 왼손을 수갑 채웠다. 그 순간 웨이터가 주문한 음식을 가져다주었고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 둘은 민망함에 한번 어깨를 들썩이고 웃었다.

그는 당연하게도 묶인 손으로 밥을 먹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 모습이 퍽이나 우스꽝스러웠다. 

밥을 다 먹고 다시 도로변으로 나와 계속 걸어 나갔다.

“Where do you even find all those people to sleep with?”

“Mostly apps.”

“갑자기 생각난 건데. 너 방에 달려있는 여우꼬리 뭐야?” 그는 박장대소를 터트리며,

“설마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진짜 웃기네. 그거 미야기에 있는 여우마을에서 기념품으로 산 거야.” 나는 수갑이 채워져 있는 그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너의 모습을 봐. 내가 그런 생각을 안 하겠나.”

나는 가끔씩 볼 수 있는 그의 아이다움을 좋아했다. 그리고 자주 볼 수 있는 그의 미성숙함에 무너져갔다. 

미성숙함(being childish)은 타자를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린아이가 타자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를테면 7살이었던 나는 미국에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없어도 미국에 살던 이 동네가 그대로 흘러간다는 사실이, 내가 없어도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때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부르면 상대방은 내 목소리만 들린다는 것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게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던 미성숙한 상태였다. 

그런 반면 어리 아이다움(being playful)은 나의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다. 놀이(play)란 내가 어떤 영향력을 행사함에서 기쁨을 느끼는 과정이라고 니체는 말했다. 어린아이가 연필을 던지고 그것이 굴러가는 것을 보고 웃는 이유는, 본인의 힘의 작용을 눈으로 확인한 것에서 느끼는 쾌의 감정 때문이다. 즉 자신이 외부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믿는 천진난만한 긍정이 본연의 모습이다. 안타깝게도 아이들은 세상을 만나 사회적 기대와 억압으로 스스로의 힘에 대한 무력함을 배운다. 일원이 되기 위한 사회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학습하게 되는 수치심과 죄책으로 원래의 순진무구한 힘은 희미해져 간다. 그렇게 어린아이다움을 잃으며 보통의 성인이 된다. 

하지만 내면의 어린아이를 잃는 것과 타자를 인지하게 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의 세상이 있듯, 타인의 세상이 있음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성숙함의 과정이지 어린이다움을 잃는 과정이 아니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되지 말라' 라던지 '너무 빨리 철들지 말라'는 말들을 미성숙함을 잘못 낭만화해 이해하는 경우들이 있다. 내면의 자아를 보살피고 어린아이다움을 유지하라는 의미이지 자신의 세상에 갇혀 미성숙함에 대한 핑계대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누군가가 미성숙하고 어린아이답다면, 그저 한 명의 어린이라는 뜻이다. 누군가가 성숙하면서 어린아이다움을 잃지 않았다면, 자유롭게 본인답고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에 건강한 관심과 응원을 받으며 자란 어른이란 뜻이다. 하지만 누군가 미성숙한데 어린아이다움을 잃었다면 그는 정서적 무관심 혹은 지나친 간섭으로 온실 안 화초처럼 자신만의 세상에서 나오지 못한 채 본인의 영향력을 발견하지 못한 몸만 성인이 된 것이다. 나는 쌤에게 이 차이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이시가키섬으로 돌아와서 항구 근처 바닷가를 들렸다. 문득 가방 속에 노트가 있다는 것이 생각나 꺼내어 두 장을 찢어 한 장을 쌤에게 건넸다. 

“우리 뭐 써서 와인병에 넣어 바닷속으로 던져버리자.”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말했다.

‘Sam said, plans can change and life is pain. He was damn right.’ 나는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뭔가를 길게 적어 내렸다. 보여달라는 나의 보챔을 뒤로 한채 남은 와인을 비워버리고 종이를 먼저 넣었다. 나도 돌돌 말아 와인병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바닷속으로 힘껏 던졌다. 와인병이, 우리의 말들이 둥둥 떠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내가 망설임 없이 쓴 단어들에서 나의 알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음을 느꼈다. 

“You know this is illegal.” 그가 말하자 나는 머쓱 웃었다.


숙소로 돌아가니 시간이 많이 늦어 있었다. 한 젊은 부부로 보이는 주인이 운영하는 에어비앤비었다. 아내분은 부엌에서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고 남편은 거실에서 기타를 치며 조용조용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다른 게스트들도 거실에 나와 노래를 듣거나 비치되어 있는 만화를 읽거나 고양이를 구경하며 있었다. 

그런 정겨움을 뒤로한 채 나는 씻고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폈다. 쌤의 짐이 보였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씻으러 갔겠거니 생각하고 잠을 청했다. 새벽에 눈을 떠보니 짐이 그대로였다. 누구도 방에 들어온 흔적이 없었다.

이전 19화 5월 3일 아메리칸 빌리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