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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May 12. 2024

포인트를 적립하세요

무언이 아닌 무언의 안부인사

몇 달 사이, 카드내역서가 화려해졌다. 누가 보면, 보따리 장수인 줄. 출장이 많은 업무의 특성상, 전국을 돌아다니며 급할 때마다 가까운 곳에서 필요한 생필품을 조달한다. 대구에서 지낼 때엔 프랜차이즈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외지 다니니 프랜차이즈만큼 안전한 곳이 없다. 커피 가격이 얼마일지, 빵맛은 어떠할지, 어떤 물건들을 파는지 크게 고민하지 않고 쉽게 가게의 문턱을 넘을 수 있다. 결제를 코앞에 두고 점원이 항상 묻는다. "포인트 적립 해드릴까요?"


다시 올 일이 없을 것 같은 가게에선 정중히 거절하지만, 프랜차이즈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미 만들어 놓은 회원번호가 있고 전국 어디서든 적립이 가능하니까. 재밌는 건 모두 내 이름으로 된 것은 아니고, 엄마와 동생의 이름으로 적립을 하고 있던 곳들이 있기에 나는 어떨 땐 엄마의 이름이 되었다가 또 어떨 땐 동생의 이름이 되곤 한다. 그리곤 또 이어 생각하길, 적립이 되었다는 알림이 핸드폰에 뜨면 엄마가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겠구나, 하고. 반대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대구에서 머-얼리 떨어진 곳에 있지만 어느 아침엔 동생이 출근 중에, 또는 점심시간에 커피를 사 마시고 있다는 것을 알림톡으로 전달받는다. 동선이 노출되어도 포인트 적립을 놓칠 순 없으니. '여길 갔구먼'하고 피식 웃음이 나올 때마다, 어쩌면 우리에게 것은 지금 무탈히 잘 지내고 있다는 무언의 안부인사인 것도 같았다.



스무 살, 집 근처 대학가의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몇 달간 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푼돈에 가까운 시급이었지만 성인이 되어 처음 하는 아르바이트였기에 돈을 떠나 잘 해내고 싶었다. 그리고 특히 알바생용 유니폼과 모자가 너무 예뻐 보였거든. 어느 정도 적응기를 거쳐 믿음직스러운 알바생이 되었을 무렵, 나는 거의 계산봇(?)에 가까운 수준으로 포스기를 두드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번 돈에 비해 보람은 지금보다 그때가 더 컸던 것 같기도 하다.


계산대 앞에 선 손님에게 "봉투 필요하세요?" "적립이나 할인 필요하세요?"하고 자연스럽게 멘트를 날리며,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에 도파민을 내뿜고 있던 어느 날. 스무 살인 나보다는 나이가 좀 더 있어 보이는 어느 대학생이 손님으로 왔다. 계산하는 동안 그는 봉투가 필요하다 했고, 빵값은 카드로 봉투값은 현금으로 계산하겠다며 100원짜리 동전을 내밀었다. 봉투값 20원을 제외한 80원을 거슬러주려던 순간, 갑자기 그가 손을 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아뇨, 잔돈은 됐어요. 그냥 다음에 저 오면, 제 얼굴 기억해 뒀다가 봉투 주세요. 적립해 둘게요!"


"네?" 저기요, 저는 사장님도 아니고 알바생인데다 심지어 주말에만 일하는 알바생이랍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에게 손해가 가선 안 될 일이니 잔돈을 거슬러 주겠다고 했다. 나중에 서로 기억을 못 할 수도 있고 내가 일하지 않는 날엔 어쩔 거냐는 나의 말에, 상관없다며 그는 웃으며 빵이 담긴 봉투를 집어 들고 빵집을 나섰다. 누가 들으면 자칫 플러팅(?)이라 오해할 수 있겠지만, 결코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짧은 찰나였지만, 그저 내 눈에 그는 유쾌함과 자신감을 겸비한 멋진 대학생 오빠처럼 보였다. 정말로 그 후에 그가 빵집을 찾아와 내 얼굴을 보고 자기를 기억하냐며, 봉투를 챙겨달라 말하길 기대했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아르바이트를 그만둬야 했기에 안타깝게도 그를 만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내가 아직도 그의 당당함을 기억하는 걸 보면, 아직 나에겐 그가 적립해 둔 80원의 포인트가 남아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나의 글동지들로부터 연락이 닿아 오랜만에 그들과 만나게 되었다. 마음의 보건실과도 같은 곳에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의 글을 나누며 함께했던 우리는, 봄이 되면 다시 만나기로 하고 겨울방학을 맞았다. 그러나 그 사이 나는 발령이 나 인천으로 와버렸고, 태평양의 한가운데에서 황홀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진은 곧 그녀가 너무나 사랑하는 제주로 두 번째 여정을 떠난다고 했다. 글을 쓰는 일보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사진으로 담는 일에 더 매료돼 있던 그녀는, 나에게 그녀가 담아 온 사진들을 보여줬다. 절로 입을 벌리게 되는 풍광을 바라보며, 나는 그녀가 왜 더 밝고 예뻐진 얼굴로 돌아왔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글을 잠시 놓고 있었던 진과, 함께 모임을 할 때처럼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글 쓰는 일에 소원해져 있던 용. 그는 모임을 쉬는 동안 책을 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겠다 했는데, 다시금 자신의 글을 꺼내 읽어볼 때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글들이 자꾸만 늘어났다고 했다. 주저함이 만들어낸 착시현상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각자의 바쁜 일상에 뒤쳐져 글 쓰는 일을 게을리하게 되었다는 그들에게, 나는 다시금 당신들의 글이 읽고 싶다고 말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글로 각자의 위치에서 잘 살고 있음을 알려주었으면 좋겠다고. 갑자기 띵동 울리는 포인트 적립의 알림톡처럼, 함께 있지는 않지만 각자 빛나는 생의 한가운데에 어떤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는 알고 싶으니까.



밖에서 보내는 시간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귀를 스쳐 지나간다. 가뜩이나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은데, 어떤 날은 침대 머리맡에서 어떤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이 누구였던가를 한참을 고민하기도 한다. 큰일이다 싶다가도, 나쁜 이야기면 그가 누구인지 잊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긴다. 반대로 좋은 이야기라면 억지로라도 누구였던지를 떠올리려고 노력해 보는데, 그래도 안되면 포기하고 '혹자'라는 괜찮은 표현이 있으니 언젠가 그를 언급할 때엔 그 표현을 빌리기로 했다.


그러나 내가 친애하는 진과 용의 글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기억력에 뒤쳐져 '혹자'의 말과 글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도 80원을 남겨 둔 그가 기억나듯이, 우리도 그렇게 서로에게 틈틈이 포인트를 쌓으며 각자의 위치에서 안부를 전하고 포인트를 적립해 주었으.


언제, 어느 곳에서든 잘 지내고 있다는 무언이 아닌 무언의 안부인사. 소심하지만 진정성 있는 방식으로 통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행이다. 그렇게 오늘의 이 글도, 누군가에게는 내가 멀리서 적립한 포인트가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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