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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Sep 08. 2024

공전하는 방향과 반대로

결국 지나갈 것을 알지만

올해 여름은 유난히 뜨겁고 버거웠다. 쨍하게 해가 나서 습기 머금은 것들을 쫙 말려주면 좋았으련만, 눈 부시지 않은 뜨거움 속에 티 나지 않는 많은 것들이 곪았다가, 고름을 짜냈다가, 회복했다가를 반복했다. 와중에 나 또한 우산인지 양산인지 모를 검은 가림막을 쓰고 다니며, 나를 가렸다가 드러냈다가를 반복했다.


영영 가지 않을 것만 같았던 더위가 조금 가시자마자, 이러다 또 훅 쌀쌀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후 홀로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의 아주머니가 저녁 장사를 위해 형광등을 켜시며 말씀하셨다. "이제 6시 반 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을 켜야 하네." 선선해진 날씨와 함께 점점 짧아지는 해의 시간. 그 뜨거운 날들이 지나가는 동안 지구도 부지런히 공전하여 계절이 바뀌고 있단 사실이 실감됐다. 그리고 매년 겪는 환절기의 애매모호함과 반가움과 아쉬움도 함께 공전하며 나를 찾아왔다.



유난히 짧을 것만 같은 가을을 만끽하기 위해, 최근엔 차를 놔두고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지하철 역까지 오가는데 한참을 걸어야 하지만, 아침에 기숙사 문을 나서며 어제보다 더 파랑으로 물든 하늘을 보는 일, 끈적임 없는 바람이 머리카락으로 목을 간지럽히는 일들이 마음을 안온케 한다. 기숙사에서 지하철역까지, 또 지하철역에서 청사까지 걸어서 출근했다가, 퇴근 후에는 다시 반대로. 그렇게 걷다가 기숙사로 돌아오는데, 그 사이 밀려온 피곤과 함께 여름 내내 겪었던 불면의 밤도 사라졌다. 일찍 잠에 드는 건 물론이거니와, 점점 더 늦게 떠오르는 해 때문인지 아침에 눈을 뜨는 일도 조금 힘들어졌다. '더 일찍 자야지', '오늘은 더 일찍 자야지'하고 되뇌며 출근 준비를 한다.




주말 사이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결말이 왠지 모르게 슬펐다. 혹시나 뒤에 더 다른 결말이 있나 싶어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그렇게 버텨보았지만, 별 다른 해피엔딩은 없었다. 아쉽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헛된 기대가 없는 슬프지만 깔끔한 결말. 영화를 보고, 근처 성당에 들러 미사를 하고, 또다시 홀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찬 것을 많이 먹어 배앓이가 잦았던 여름. 그저 차고 시원한 것만을 찾았는데, 요즘엔 더욱 뜨듯한 국물이 있는 음식을 주문한다.


계산을 하려 하는데, 아주머니가 "맛있게 드셨어요?"하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날 누군가와 육성으로 나눈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 한 마디였지만 그녀의 표정과 따뜻한 말투에 하루치의 다정함이 다 채워졌다. 맛있었다고, 자연스레 터져 나온 웃음과 함께 인사를 드리고 식당을 나서는데 나오자마자 한결 더 선선해진 공기에 기분이 좋았다. 무엇 하나 군더더기 없이, 끈적임 없이 마무리되는 하루. 마음에 결이 있다면, 마지막까지 빗으로 곱게 빗어 놓은 것 같았다.



선풍기 바람이면 충분하고, 그늘진 곳이면 다행이었다. 어느 것 하나 불편함, 불쾌함 없이 다시 돌아온 내 방에서, 이 가을이 만끽할 새도 없이 훌쩍 지나갈 것 같아 벌써부터 아쉬워진다. 그러나 아쉬울 겨를 없이, 지구는 지금도 공전하고 있다.


이 계절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혹여 기대했던 색다른 결말이 없더라도, 그러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결말이기를. 그러기 위해서 더욱 부지런하게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공전하는 방향과 반대로 움직이며, 조금이라도 이 계절을 꼼꼼히 마주하다 보내고 싶다. 가을, 가을, 갈, 결국 갈 것이라고 말하는 계절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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