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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선의의 가벼움

글로 쓰는 소화제

by autumn dew

2월 14일, 이 연차에 이르기까지 이런 걸 챙기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부서에서 유일한 여자이자 막내인 만큼 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올해도 어김없이 선배들의 책상 위에 초콜릿을 하나씩 올려두었다. 한 달 뒤를 지켜보겠다는 의미로 올려둔 것은 아니었는데. 3월 14일을 앞둔 어느 날, 출장지에 있어 당일에 챙겨주지 못할 것 같았던 선배들은 미리 나를 위해 초콜릿을 준비했었고 덕분에 과분한 양의 초콜릿을 일찍 선물 받았다. 예상 밖의 깜짝 선물이었다.


조금 일찍 받은 초콜릿을, 화이트데이 당일엔 선배들에게 받았다 자랑하며 다른 부서의 후배들과 나눠먹었다. 선배들도 나처럼 이 연차에 이르기까지 이런 걸 챙기고 있을 줄 몰랐을 텐데. 우리 부서는 감사실이지만, 이렇게 서로 다른 형태의 감사를 주고받기도 한답니다.


그 무렵 사무실엔 매달 주문하는 다과들이 잔뜩 택배로 배달되었다. 박스를 열었을 때 주문한 적 없는 고급 초콜릿이 하나 있었는데, 업체에서 화이트데이를 앞두고 사은품으로 넣은 듯 보였다. 고맙긴 하지만, 사실 단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데다 난 이미 이가 썩을 정도의 초콜릿을 선물로 받은걸. 우선은 초콜릿을 냉장고에 조용히 넣어 두었다. 누굴 주면 좋으려나.


그러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침마다 마주치는 우리 층의 미화 여사님이 생각이 났다. 이런 날에 가장 의미 부여를 하지 않을 사람. 어쩌면 기대도 없을 사람. 그녀가 문득 떠올랐다. 어차피 나는 우리 부서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는 편이니 그날 아침, 일찍 출근하는 여사님께 슬쩍 가져다 드리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당일이 되었고, 이른 아침 냉장고에서 초콜릿을 꺼내 후다닥 여사님을 찾았다. 자랑할 일도 아니고, 여사님을 만나자마자 "오늘 화이트데이라서요!"하고 후다닥 초콜릿을 전해드렸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순간 당황한 여사님도 부끄러우신 듯 고맙다는 인사를 조용히 건네셨고 우리는 그렇게 재빨리 헤어졌다. 직접 산 것도 아닌, 덤으로 받은 건데 잘한 건지 못한 건지 아리송한 마음을 안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후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던 이번 주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 일찍 출근해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는데 사무실 밖에서 누군가 다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이 지각할 시간도 아니고, 누가 저렇게 급하게 뛰어오나 했는데 노크 소리가 난 건 우리 사무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분은 다름 아닌 여사님이었고, 여사님은 그날 아침의 내 모습과 비슷하게 헐레벌떡 내 손에 봉지 하나를 쥐어주시고 떠나셨다. 봉지 안엔 살구빛의 마시는 요구르트 여러 개와 떠먹는 요구르트 하나 있었는데, 청사로 온 요구르트 배달원을 만나 급하게 이것들을 사신 것 같았다. 세상에, 전 제 돈으로 사드린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돌려주시면 전 부끄러워 어쩌나요.



얼마 전, 회식을 끝마치고 어느 선배와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그가 나에게 말했다. 나이가 많은 중년의 선배들을 모시느라 고생이 많다고. 일일이 하나하나 챙기고 있는 게 많을 것 같아 힘들겠다고. 그의 말대로 솔직히 실제로 내 역할의 범위를 넘어서는 선의를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함으로 인해 그들로부터 떤 인정이나 일말의 반대급부를 기대하진 않다.


그들로부터 나 또한 무언가를, 어떠한 형태의 대접을 받고 싶다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저 그 어떤 기대도 없으니 주는 마음, 드리는 마음에 잡생각을 덧붙이지 않고 않았을 뿐. 주고 싶으니 주는 것,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라 행함에 있어 엉덩이든 손이든 전혀 무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너무 가벼웠던 탓인지, 가끔은 너무 큰 모양의 선의가 내게 되돌아온다. 애초의 가벼운 마음이 부끄러울 정도로. 그러고 보니, 선배들이나 여사님 뿐만이 아니라 화이트데이 당일엔 다른 부서의 동료에게 사탕까지 선물 받았다. 참 많은 이들로부터 예상 밖의 뭉클함을 두 손으로 전해받았다. 달달하기 그지없는 날이라 생각했지만, 따지고 보면 지금껏 참으로 건방지게도 나만이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선의를 기대 없이, 주저하지 않고 가벼이 행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이 아닐까. 금전적으로 크나큰 재산이나 이런 걸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굳이 무언갈 돌려받을 기대를 품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남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나는 배가 부른 상태. 배부른 건 얼굴에 티가 나지 않으니까. 그러다 이렇게 갑자기 생각지 못한 선의가 휘몰아치듯 되돌아올 때, 이것이 거울이 되어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배가 부른 상태였는지를 직시하게 된다. 하지만 여사님께 직접 사지 않은 초콜릿을 선물로 드린 일은 부끄럽다. 여사님이 이 글을 보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가끔 찾아오는 이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또다시 선의는 가볍게 행할 것을 다짐한다. 주저하지 않기를. 가벼운 것이 얼마나 무겁게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가벼이 흩뿌려진 사소한 홀씨의 힘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어느 방향에서 꽃이 필지 모를 일이다. 신 쓸데없는 시건방은 조금 내려놓기로 한다.



꺼-억.

2025년, 화이트데이의 기록. 배가 부르다 못해 이렇게 소화제까지 글로 남겨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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