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부모와의 분리로 시작되는 원초적인 외로움을 지닌 존재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단이라는 또 다른 뱃속에서 친밀감이라는 탯줄을 쥐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잘한 만족과 행복을 찾으려고 한평생을 힘겹게 살아간다. Reis와 Shaver(1988)는 자신의 경험이나 감정을 누군가에게 표현하고 또 그 표현에 대한 상대의 공감이 그들 사이의 친밀감을 높인다고 하였다.
공감... 생각해 보면 정말 어려운 단어이다.
공감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감정이다.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집단은 작게는 가족으로 크게는 지역사회와 나라를 이루고 있다. 이 집단은 사회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보호하고 통제한다. 또한 사람들은 그 속에서 공감이라는 감정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늘 그렇듯 집단이 공유한 경험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또 당연하게도 사회는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사춘기의 혼돈을 이해는 하지만 받아들일 가치가 없다는 '중2병'이라고 희화화하고 어린아이들의 고집을 '쌩떼'라며 웃어넘긴다. 규율이 어려운 직장인은 '사회부적응자'가 되며 가난은 수치이자 자기를 돌보지 못한 인생의 낙오자로 낙인 된다. 이것뿐일까? 세상에는 수만 가지의 형태로 공감받지 못한 루저들이 공감이라는 어려운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각자 살아가는 존재이다. 사람 '人'의 어원도 서로 의지하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던 시절의 잔재가 아닐까? 단지 먹고 살아가던 시절의 생존과 지금의 생존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니 공감받지 못한다고 생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까...
물론, 현대 사회의 생존이란 사회적 적응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차별화하고 동시에 규범에 맞추어 사회적 배제로부터 자신도 구제해야 하는 좀 더 복잡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복잡함이 인간의 삶을 더욱 어렵게 하거나 더 많은 과제와 고통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맞물려 외로움이라는 지독한 감정을 겪게도 한다. 생각해 보면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다수의 현대인이 공감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아는 피곤한 감정을 누구도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러니. 이것이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난센스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에 대한 공감이이다. 내가 살아온 인생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나에게 공감하는 일. 이러한 감정은 사회적 공감만큼 중요하다. 하지만 현대인은 이조차도 어렵다. 학교를 가기 싫어도, 직장이 끔찍해도, 일주일 내내 큰소리로 웃어본 시간이 10분 채 되지 않아도... 우리는 자신보다 사회적 경험에 공감하며 살아간다.
그래도 가끔은 시간을 내어 자신에게 공감해야 한다. 좋아하는 커피 향을 천천히 즐길 시간을 내어주고, 따뜻한 음식으로 수고했다 웃어주며, 아무렇게나 바닥을 뒹굴며 깔깔대기도 하고... 가끔은 미친 사람처럼 소리 내어 울어보기도 하며... 우리가 어린아이였던 자신에게만 집중하던 그 시절로 가끔은 돌아가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