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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yj Sep 18. 2023

우울증

 오늘도 10층 베란다에서 떨어지는 상상을 한다. 추락은 확실히 모든 것을 멈추는 방법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 그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 급하게 머리를 흔들어 상상을 흩뜨린다. 

 삶은 축복이자 선물이라던 세뇌에도 즐겁지도 행복하지도 않던 내 인생의 반이 지나가고 있다. 그래서인가? 요즘 들어 축복도 선물도 아니었던 삶을 끝내는 방법을 자주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이와 함께 죽어가는 것도 좋겠지. 주름은 삶을 잘 살았다는 증거니까. 하지만 추잡하고 지저분한 외모가 삶의 보상이 되는 것은 싫다. 그럼 자살은 어떨까? 자살은 너무 많은 형태와 가학이 존재한다. 스스로를 던지거나 굶주리게 하고, 혈관을 찌르고 가스를 마시며 최고 수준의 학대를 통해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런 끔찍한 과정들을 겪을 만큼 내가 잘못한 것이 많은가? 그래서 이것도 싫다.  


 나는 왜 죽음의 상상을 멈추지 않을까? 친구가 없어서? 친구라는 존재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 숭고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는 유희적이 존재이다. 그러면 가족의 위로가 없어서일까? 가족도 개인들로 만들어진 구성일 뿐. 그들도 피해받는 것이 싫고, 힘든 가족과는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그럼 친구도 가족도 아니면 나는 왜 죽고 싶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나는 꽤 오랜 기간 병원을 다니고 있다. 


 의사는 오늘도 웃으며 반긴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에게 나는 사회 부적응자 중 한명일뿐이다. 의사는 늘 그렇듯 ‘어떻게 지내냐?’, ‘별일이 없냐?’ 물어본다. 별일이 없었다고 대답하면 전에 먹던 약을 더 먹고 경과를 지켜보자 한다. 그러면 나는 또 생각에 빠진다. 어떤 경과일까? 언제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는지 지켜보자는 것일까?  


 병원에서 집으로 오는 길도 별 것이 없다. 거리에는 온갖 종류의 간판들이 자기를 봐달라고 아우성이지만 먼지 가득한 치장일 뿐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 마치 나의 청춘처럼. 젊은 날, 사람들은 늘 말했다. 아무도 너한테 관심 없다고. 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고. 그런 평범한 말이 참으로 좋았는데 이상하게 나는 사람들 시선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관심 없는 사람들의 시선을 끝없이 의식하며 고달픈 청춘을 보냈다. 마치 거리에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간판처럼, 아무것도 아니던 나의 청춘은 참 시시하고 재미없었다.     


 집도 별 것이 없다. 아파트 하나 사자고 죽자고 달려왔지만 이곳은 또 다른 족쇄이다. 나는 대출을 갚아야 하고 또 다른 부자를 부러워하는 멍청한 중년이 된 것이다. 혼자서 무언가를 하기도, 과감하게 도시를 떠날 용기도 없다. 하지만 삶은 누구의 고민도 상관하지 않고 흘러간다. 나도 더 이상 예쁜 옷과 긴 머리가 어울리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전문가처럼 보이려고 노력해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많은 것을 가진 척 웃어도 아무것도 없어 슬프다. 누군가의 화려한 차가 부러워도 쿨한 척, 검소한 척하지만 누구보다 찌질하고 허세투성이다. 그러니 내가 매일 베란다로 뛰어내리는 상상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나는 병원에서 가지고 온 약을 먹었다. 그리고 뭘 할까 잠시 생각했다. 물론 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커피를 내리고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간다. 머릿속의 전쟁을 속이고 평온한 척 산책을 한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내일이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겠지. 그래도 다행히 나는 오늘도 죽지 않았다. 그럼 내일도 살아지겠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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