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진 박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무심하고, 조금은 투박한 모습 그대로였다. 말끔하게 정리된 머리와 단정하게 차려입은 옷매무새도 너무나도 익숙했다.
"들어 와." 이박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잘 지냈어? 요즘도 많이 바빠?" 김박사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 왔다. 이박사는 그의 평온한 말투에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이 느껴졌다. 사람들을 죽어가고 세상은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데 이렇게 태평하게 안부나 묻고 있다니...
"김박사, 설명해 줘. 이게 도대체 다 무슨 일이야?"
"노인이 설명해 주지 않았어? 두 명의 김선에 대해서..."
"지금 노인은 코마 상태야. 그리고 내가 궁금한 것은 당신이 무당을 죽였느냐는 것이고." 그녀는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이제 곧 또 다른 살인이 예고되어 있고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 김박사는 여전히 평온했다.
"정말 여섯 명의 제물이 필요해? 무당이 첫 번째였어?"
"그건 노인이 말해줬나 보네. 그런데... 맞는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어." 김박사가 희미하게 웃었다.
"김박사, 혹시 형의 일은 알고 있어?"
"형의 일? 죽은 거 말하는 거야? 알고 있지." 김박사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형이 무당처럼 죽은 것도 알고 있어? 설마 그것도 당신 짓이야?" 이박사는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공포스러웠다.
"형은..." 김박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형은 안 됐지만 그냥 휘말린 거라고 생각해. 내가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거든."
"그래서? 김박사가 죽였어?" 이박사는 대답을 재촉했다.
"누구에게나 인연을 이어주는 무언가가 있어. 사람이든, 장소이든, 시간이든.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고 알지?모든 것을 때가 있다고.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모든 것이 깨어나 앞으로 나가게 된다고. 나를 포함한 우리의 인연들은 지금이 그 때인가 봐. 삼시업(三時業)으로 엮여 있던 인연도 이제 끝나가고 있어." 김박사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들은 덤덤하게 얘기했다.
"그래서... 당신이 무당을 죽이고 형을 죽였냐고?"
"그들은 받아야 하는 벌을 박았을 뿐이야. 그저 전생부터 이어온 순생업(順生業)이지..."
"그게 형을 죽인 변명이 될 수 있어? 어떻게 한 평생을 함께한 형제를 죽일 수 있어?" 이박사는 치밀어 오르는 화 때문에 눈물이 고였다.
"형은 그 예전처럼 지금도 선을 돌보고 있었어. 그가 만들었던 잘못된 인연에 대한 벌을 받은 것 뿐이야."
"김박사, 정신 차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진짜 미친 거야? 아니면 정말 악마가 세상에 나오도록 돕고 있는 거야?" 김박사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더니 이내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의 눈에는 알 수 없는 슬픔도 어려있었다.
"나는 꽤 오랜 시간을 두려움 속에 있었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원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했어. 나는 늘 외로웠고 늘 지쳐있었어. 예전에도 지금도. 사실 나는 세상이 어떻게 되든 관심이 없어. 그저 이 지루하고 힘든 세상이 하루빨리 끝나길 바랄 뿐이야. 새타니가 속삭이던 다정한 약속들도 내가 선택한 거였어." 김박사의 말에 이박사는 어이가 없었다.
"만약에 그 노인이 전생의 당신의 유일한 자식이었다면 지금 김박사가 편들어야 하는 존재가 새타니가 아니라 김선이어야 하는 거 아냐?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살리는 편에 서있어야지 이게 무슨 짓이야." 이박사의 말에 김박사는 이윽고 눈물을 흘렸다.
"이제 거의 끝났어."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김박사. 말해줘. 두 번째는 누구야? 노인이 의식을 잃기 전에 말했어. 눈, 귀, 코, 혀, 몸, 생각의 제물이 필요하다고 했어. 무당이 혀의 제물이었다면 다음은 누구야?" 그녀의 질문에 김박사는 쓸쓸하게 대답했다.
"이박사, 그거 알아? 내 아들은 하나가 아니었어. 차가운 바닥에서 죽어간 내 아들의 영혼을 달래 줄 제물이 필요해."
"그래서 그게 누구냐고?" 그녀는 참지 못하고 이윽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 모습에도 김박사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혀는 사람들을 홀리고 생각을 흩뜨리지. 지금부터 생각의 제물들이 세상으로 나오게 될 거야. 잘 봐둬.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지."
김박사는 더는 말이 없이 이박사의 손을 잡고 소파로 이끌었다. 그리고 TV를 켜 뉴스 채널을 틀었다. 뉴스에서는 속보가 한참이었다. 화면에는 모자이크 처리된 시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쓰러져 있었고 엠블런스가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도 보였다.
"보여? 생각이 흐려진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미친 사람들이 건물에서 한꺼번에 뛰어내렸어. 그렇게라도 천국에 가고 싶었나 봐." 뉴스에서는 상황에 대한 기자의 설명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종말론에 빠진 광신도들이 박제되어 살해되기 전에 스스로 천국으로 간다는 유서를 남기고 집단 자살을 시도했다고 했다.
"한 명이 아니라고?" 이박사는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래. 노인이 그건 알지 못했나 봐. 108명이 인간이 고뇌를 짊어지고 죽었어. 저들이 두 번째 제물이야. 그리고 이제 곧 세 번째 의식이 시작될 거야. 눈의 제물." 김박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나를 쳐다보던 눈, 내 아들을 비웃던 눈, 우리를 경멸하던 눈. 그 눈을 바치는 의식이 시작되고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또 살인을 하겠다는 거야?"
"..." 김박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눈의 제물이 누구야?" 이박사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기다려. 곧 알게 될 거야." 김박사는 이박사의 손을 더욱 꼭 잡았고 그 느낌이 얼마나 차가운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왜 나를 찾아온 거야?" 이박사는 덜덜 떨며 간신히 물었다.
"이박사가 도와줄 일이 있어. 이박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날, 김박사 형은 집에서 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과 낮에 주고 받았던 말이 신경이 쓰여 동생과 상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저녁 늦게 집을 찾아온 김박사는 차분하고 조용했다. 형은 김박사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노인은 더 이상의 약물도 치료도 받지 않겠다며 요양원으로 전원을 요청했다. 그 말을 하는 노인의 모습이 겁에 질려 있었고 이박사를 불러달라는 말만 반복했었다. 형은 노인의 행동이 정동장애인지 알 수 없었지만 동생의 의견이 듣고 싶다는 생각을 들었다고 말했다.
"형. 좀 기다려 줄 수 있어?"
"치료는 본인이 원하면 들어줘야 해. 근데 고혈압이랑 심장약을 먹고 있어서 이걸 끊으면 이 노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어, 성진아,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는데 점점 무섭다." 형의 두려움이 느껴졌지만 김박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형은 섬뜩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설명해 줄 수 있어? 그 노인이 누구인지?"
"형은 왜... 모든 것을 지켜내지 못해?" 김박사는 대답대신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 예전에도, 김선을 절에서 내보내더니 이제 병원에서 떠나보내려는 거야?"
"성진아, 무슨 말은 하는 거야?" 형은 동생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지금 병원에서 내보내면 노인은 곧 죽을 거야. 그러면 모든 것이 틀어져.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있어?"
"성진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틀림 없지?"
"형, 지금 그대로 조용히 있어줘. 부탁해." 김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 모든 것의 잘못되지 않도록 부디 가만히 있어줘." 그리고는 손을 형의 목으로 향했다. 형은 김박사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고, 그건 모습을 바라보던 김박사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 순생업(順生業)은 전생에 지은 업에 대한 과보를 금생에 받거나 금생의 업을 내생에 받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