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박사가 청년을 만났던 날, 그녀는 곧바로 노인을 찾았다. 김박사 형의 이야기를 들려줘야 했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답을 얻어야 했다. 그 망할 노인만이 정답을 알고 있었다.
"설명해 주세요." 이박사는 노인의 팔을 움켜쥐고 소리쳤다.
"방법을 알려주세요. 이 모든 것을 멈출 방법을 알려달라고요!"
그녀의 다그침에 노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기관절개관을 막으며 나직이 물었다.
"박사님, 그를 만났나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새타니 말씀이세요?"
"네."
"그가 새타니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좀 전에 어떤 청년이 찾아왔었어요."
"모습이 어떠하던가요?"
"그냥 평범한 청년이었어요." 노인은 이박사의 말에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혹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이박사는 갑자기 김박사 형의 모습이 떠올라 구역질이 났다.
"김박사의 형이 죽었어요." 이박사의 말에 노인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몹시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이것도 그분의 업보이겠지요." 노인은 덤덤하게 말했다.
"이제 말씀해 주세요. 모든 것을 멈출 방법이 있기는 한건가요?"
"박사님. 제 목이 보이세요?" 이박사는 노인의 목을 바라봤다. 푸른색 기관 절개관을 하고 있는 목은 쇠약하고 주름 투성이었다.
"이 선이 보이세요?" 노인이 기관절개관을 연결한 줄을 아래로 당겼다. 그러자 그 밑으로 옅은 선이 드러났다.
"이게 뭐예요?"
"박사님,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으세요. 이제 총 5번의 살인이 더 발생할 거예요. 혹시 108 번뇌를 아세요?"
"네. 알아요."
"인간의 혀, 눈, 귀, 코, 몸, 생각이 성, 향, 미, 촉, 법의 36가지의 번뇌를 만들고 그것들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도 존재하며 108 가지의 번뇌가 만든다고 하지요. 그리고 그 번뇌를 모두 벗은 인간들은 진정한 열반에 오르게 되고요. 아마도 어리석은 무당이 새타니의 열반을 위한 첫 번째 제물이 되었나 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박사는 노인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래전에, 피어보지도 못한 어린 목숨이 어른들 때문에 사라진 적이 있었어요. 그 아이를 죽인 여자는 목이 잘린 짐승을 태워 아이를 지옥의 제물로 던져버렸지요. 그리고는 자기가 낳은 아이를 그 아이 대신으로 삼으려 했으니 인간의 잔혹함이란 상상도 하기 어렵답니다." 노인은 또다시 눈을 감았고 이내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다.
"탐욕과 어리석음은 끝이 없어요. 모든 것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미련함. 그것이 인간이에요." 노인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박사님. 아마도 새타니의 마지막 단추는 여전히 저인 것 같습니다."
"네?" 이박사는 놀라서 되물었다.
"그럼 여전히 어르신인 송연이라는 여자를 죽여야 한다는 말씀이세요?"
"아니요. 아시다시피 지옥은 절대적인 고통이 필요해요. 자신의 생을 빼앗은 것에 대한 처절한 복수, 그리고 가장 미운 존재의 절대적인 고통. 그것들을 통해 마지막 퍼즐을 맞추려는 것 같습니다."
"어르신, 제발 알아듣게 설명해 주세요." 이박사는 노인을 다그쳤다.
"제 아비가 마지막 남은 자식을 스스로 죽이고 그 아들의 피로 최후의 제사를 지내는 거지요. 6가지의 제물이 모두 바쳐지는 날, 저의 목을 잘라 마지막 제사를 지낼 거예요. 그러면 새타니가 그토록 원했던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질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세상의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박사는 노인의 말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성덕은 혀가 가벼운 인간이었어요. 세치혀로 사람들을 죽이고 능멸하고 조롱했지요. 혀의 제물이 바쳐졌으니 이제 다섯 가지의 제물이 남았습니다."
"그럼 김박사는 형은 제물이 아니란 말씀이세요? 무당이랑 똑같이 껍데기만 남기고 죽었는데도 제물이 아니라고요?"
"그는 도민의 각성을 도왔어요. 저를 찾는 가교 역할을 했고 김박사가 도민임을 지각하는 문을 열어 주었지요. 하지만 그는 제물이 아닙니다. 그저 도민의 어리석음을 일깨운 죗값을 받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럼 남은 제물이 누구인지는 어떻게 알아요? 도대체 김박사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노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눈물을 흘리며 나직이 말했다.
"그는 지옥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그의 공포를 따라가세요. 그러면 거기에 해답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는 더는 말이 없었다.
"어르신!!" 이박사가 애타게 불렀지만 노인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기상캐스터 실종 사건으로 일주일 내내 전국이 시끄러웠다. 최근 발생한 뒤숭숭한 살인과 잘 나가던 기상캐스터의 실종은 사람들을 공포로 밀어 넣기 충분했다. 얼마 전까지 웃음이 넘치던 학교는 무기한 휴교령이 내려졌고 분주하던 오가던 길거리에도 다니는 사람 하나없이 없어 휑했다. 불안한 사람들은 더욱 움츠렸고 어느 누구도 낯선 이들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의 살인 사건은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기괴했다. 박제된 인간의 시체라는 것은 전설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과학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일련의 사건들로 교회들은 종말을 앞다투어 전도했고, 들어보지도 못했던 수많은 사이비들도 길거리에 난무하였다. 수십 년 전에 잠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내장이 사라진 시체의 악몽은 현대의 인터넷이라는 활로를 통해 스멀스멀 기어올라와 기하급수적으로 퍼져나갔다. 핸드폰을 통해서 실시간 전해지는 공포는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날씨는 더욱 미쳐 날뛰었고 비조차 내리지 않았다. 세상이 이 지경이니 무신론자조차 광기 어린 신도가 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말로 세상은 시간을 다투어 멸망의 길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박사는 일주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성덕이 죽었고 김박사는 사라졌다. 이상한 녀석은 세상을 종말을 경고했고 유명한 기상캐스터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이박사는 그녀가 송연이라고 확신했다. 청년이 말했던 해가 지고 달이 뜨기 좋다던 그날, 그녀가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갑작스럽게 코마 상태에 빠져버렸고 이박사는 또 다른 제물은 도대체 누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이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날씨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더웠다. 아파트 화단이나 거리의 가로수도 말라비틀어져 있었고 아스팔트는 열기로 1분도 서있기 힘든 날씨였다. 이대로 그냥 세상이 망한다고 해도 미련조차 없을 정도로 견디기 어려운 그런 날이었다.
이박사는 연구실에서 다시 금등지사(金縢之詞)를 꺼내 읽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김선과 송연에 대한 다른 정보를 찾아보는 것뿐이었다. 이들과 지독하게 얽힌 인연이 반드시 제물로 바쳐질 것이 틀림없었다. 김선에게는 모든 것의 시작인 도민이 있었고 그의 아내인 월영이 있었다. 이박사는 이들에게서 시작된 고리이니 이들에게서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월영을 꾀던 무당은 가장 먼저 제물이 되었고 그녀는 세치혀의 죗값을 받았다. 남은 것은 눈과 귀, 코, 몸, 생각이다. 누가 악마의 눈과 귀, 코와 몸과 생각이 되었을까?도무지 알 수 없는 실타래였다.
한참을 금등지사를 뒤적이던 이박사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 아이, 김선을 대신해서 죽은 아이.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아이의 시신은? 만약에 고빈(藁殯)을 했다면? 이박사는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떨리는 손으로 책장에서 성호사설(星湖僿說)을 꺼냈다. 그리고 염매를 찾았다. 설마 그 아이를...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이박사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염매에 대한 부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만약에 아이를 대나무 통에 넣어 굶겨 죽인거라면... 그렇다면 몸의 제물은 반드시 월영이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녀를 찾아야 하지? 다급해진 그녀는 김성진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전화 연결음이 들려왔다. 당연히 안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연결음이 대여섯번 울리더니 김박사의 덤덤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이박사?"
"김박사, 내 말 들려?"
"그럼, 잘 들리지." 김박사는 어제 만나고 헤어진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았다.
"거기가 어디야?" 이박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그게 왜 궁금해?"
"김박사, 지금 나 좀 만나. 꼭 물어볼 것이 있어."
"그거 잘 되었네. 나도 꼭 물어볼 것이 있었는데." 김박사의 대답에서 알 수 없는 공포가 느껴졌다.
"어디서 볼까? 나는 지금 연구실인데 이쪽으로 올래?"
"그래." 김박사는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박사의 방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빈(藁殯): 시신 또는 관을 땅에 놓고, 짚이나 풀 등으로 엮은 이엉을 덮어 만든 야외 매장
***성호사설(星湖僿說): 실학자인 성호 이익(李瀷)의 문답집을 엮은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