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병원에 입원한 후로 조금씩 기억을 찾기 시작했다. 노숙인으로 살아가던 시절에 대한 기억도 일부 생각이 났다. 그 시절, 길바닥에서 구걸로 살아가던 시절,..몸에는 자주 토사물이 묻어있었고 장기간 끊은 정신분열증 약으로 끝없는 환청과 환시에 시달렸다. 기억은 늘 흐렸고 어떠한 것도 또렷한 것이 없었다. 그런 기억들 사이사이에서 드문드문 보이는 누군가의 얼굴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나의 친구이자 가족이었던 악마의 자식, 김선이었다. 하지만 어쩐일인지 녀석은 말을 걸어오지 않았고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저 스치듯 지나갈 뿐이었다. 무엇보다 더 이상한 일은 녀석이 보이던 날이면 어김없이 주변의 노숙자 중 한 명씩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얼어 죽거나 굶어 죽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 명 두 명 젊은 노숙인들이 사라질 때는 장기 매매자들이 납치해서 죽여버렸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당시의 나는 길 위의 인생 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몰골이었고 누구도 상대해주지 않는 외톨이었다. 가끔은 용기 내어 말을 걸어도 누구하나 대답조차 없었다. 물론 그런 무관심과 무시는 너무나 익숙했지만 철저하게 궁지로 몰리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병원에서의 생활이 그립다는 생각도 간간히 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한 계절이 지나고 다름 계절이 순서를 재촉하던 3월의 어느 날, 옆자리에서 박스를 덮고 자던 노숙인 한 명이 죽을 채로 발견이 되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40대 중반의 남자였던 것 같다. 아마도 그가 나에게 빵과 소주를 건네던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쩌다 노숙인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말투에는 교양과 다정함도 묻어있었다. 물론 나는 그 사람과도 대화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나에게 음식을 건네던 순간만이 하루 중 유일하게 허락된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이었을 뿐이었다. 사실 그의 죽음은 길 위의 다른 죽음과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 늘 그렇듯 자연스러운 죽음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경찰이 하루를 멀다 하고 노숙인 쉼터를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저 무연고자로 처리하면 그만이라 생각했던 그 남자의 죽음은 살인이라는 엄청난 반전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신원 미상자만 골라서 잔인하게 살해한다는 것이다. 경찰에 의하면 죽은 남자는 동사도 아사도 아니었고 시신에는 피 한 방울 남아있지 않았다고 했다. 남자의 장기는 화장하다 남은 뼛가루처럼 모두 사라졌고, 그의 시신은 마치 박제를 한 듯 뼈와 껍데기 뿐이라고 했다. 경찰은 누군가 이 남성을 끌고 가 박제 처리를 한 다음 길바닥에 버린 것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의식이 몽롱해서 경찰의 말이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선생님, 주변에서 이상한 사람 못 보셨어요?" 앳된 얼굴의 경찰이 물었다.
"네?" 그날도 나는 대답할 기운조차 없었다. 옷에는 구역질 나는 토사물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고 어린 경찰도 그런 내가 역겨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역겨움을 견디며 만원 짜리 몇 장을 쥐어주며 수상한 사람을 보면 연락을 달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사라지는 경찰의 뒤통수를 보며 속삭였다.
"네. 경찰관님." 그리고는 손에 쥐어진 지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얼마 만인가? 식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가. 그날 나는 자주 웃었던 것 같다.
그리고... 꼭 이틀 뒤, 박제인간과 똑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문제는 그 대상이 신원미상의 노숙인이 아니라 나에게 친절을 베풀던 앳된 경찰이라는 것이다. 뉴스에서 본 얼굴은 분명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어린 청년의 얼굴이었다. 그도 노숙인처럼 장기가 모두 비워진채 박제인간으로 발견되었다.
그해 연쇄 살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역 주변에서 구걸하던 나에게 동전을 건네던 청년, 가끔 먹을 것을 전해주던 사회복지사, 따뜻한 커피를 날라주던 자원봉사자들도 모두 속이 모두 비워진 박제인간이 되어 발견되었다. 아마도 목숨이 빼앗긴 사람은 족히 수십 명은 되었을 것이다. 경찰은 원인을 알 수 없어 발을 동동거렸고 뉴스에서는 연일 공포스러운 소식만 전하고 있었다. 세상은 말세가 되었고 사람들은 미쳐 날뛰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나로 인한 불행이라는 것을. 나에게 베풀던 친절과 다정함이 모두에게 독이 되어 돌아 갔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살인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김선과 함께였다. 절대로 범인을 찾을 수 없는 살인. 그건 진정 그림자 살인이었다. 서로에게 그림자가 되어 사람들을 죽이고 그 고통으로 서로를 성장시키는 악마의 순환 고리. 그 중심에 우리가 있었다.
설희는 무당에게 다녀온 이후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김성진 박사를 섭외해서 날씨에 대한 조언을 듣기로 한 날도 출근을 못할 정도로 불안했다. 하지만 민정이의 다그침에 어쩔 수없이 출근을 했다. 그날 뉴스의 초청자를 설희가 인솔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두렵고 공포스러운 날이었다.
김박사와는 방송국에서 자주 본 적이 있어 낯설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설희는 감정을 누르며 억지 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김박사는 설희에게 악수를 청했다. 설희는 그 모습이 왠지 예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별일 없으셨죠? 오늘 뉴스팀이 모두 바쁘셔서 저한테 박사님 안내를 부탁하셨어요. 스튜디오까지 제가 안내드릴게요. 가 보신 적은 있으시죠?"
"네." 김박사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전혀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김박사님이 이렇게 차가운 분이었나? 설희는 마음으로 생각했다.
촬영은 별 문제가 없이 진행이 되었다. 여전히 이상 기온과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전염병, 기아, 화재 등이 주요 이슈였다. 한 가지 다른 것은 김박사의 표정이었다. 예전과 같은 총기나 시니컬한 말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책을 읽는 듯한 어색함마저 느껴졌다. 그래서인지방송이 끝나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다행히 방송은 큰 문제는 없었다.
"설희씨, 반가웠어요." 김박사는 어느새 셜희 옆으로 다가왔다.
"네. 오늘 수고하셨어요."
"저기... 오늘 일정이 있으세요?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오늘은 달도 뜨고 해가 지기 참으로 좋은 날이어서요." 김박사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세요?" 설희의 당황한 질문에 김박사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달이 뜨고 해가 지는 시간에 제가 데리러 올게요."
"무슨 말씀이신지...?" 설희의 당혹스러움에도 김박사의 말투는 변함이 없었다.
"저는 오래된 숙제를 해야 해요. 그걸 도와주시겠어요?" 김박사가 다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은 일전의 무당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설희는 온 몸에 또다시 한기가 느껴졌다.
김박사는 방송을 마치고 곧바로 병원을 향했다.
"어르신, 오랜만입니다." 김박사가 웃으며 노인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네. 박사님 오랜만입니다." 노인은 그의 모습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김박사는 노인의 주위로 천천히 걸어갔다.
"박사님, 저번이랑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김선을 만났군요."
"김선?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어르신이 김선이 아니세요?" 김박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새타니를 만났군요. 아니면 성덕을 만났나요?" 노인은 차분하게 다시 물었다.
"네. 무당을 만나서 제가 누군지 알게 되었어요." 어느새 김박사는 노인의 옆에 바짝 다가왔다.
"이제 저를 죽일 건가요?"
"아니요. 저는 아무도 죽이지 않아요. 저는 두려움이 많은 나약한 인간일 뿐이지요."
"그럼.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조금 있으면 당신 형이 올 거예요. 그에게도 모든 것을 숨길 건가요?"
그 순간 김박사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노인의 뺨에 손을 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를 못 본 지가 꽤 많은 시간이 지났구나. 너는 이제 낡은 가죽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노인의 모습이 되었어." 김박사의 말에 노인의 몸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지 마라. 아들아. 너는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단다. 너에게 간 목숨은 네 것이 아니었어. 그래서 너는 오랜 시간 고통을 받았을 거야. 네 것이 아닌 것을 자진 죄. 너는 그것 때문에 억겁의 시간 동안 고통을 받았구나." 김박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 아이를 만났다. 아주 예쁘고 똑똑한 아이로 다시 태어났더구나. 예전에도 너를 지키는 참으로 당찬 아이였는데 여전히 사랑스럽고 당당한 모습이었어. "
노인은 흠칫 했다. 벌써 송연의 일까지 알고 있었던가?
"너는 내 아비였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를 버리고 그 대가로 역병에 걸러서 죽어버렸지."
"아니다 아들아. 나는 너를 지키고 싶었어, 마을 사람들이 너의 태워 죽이자고 했을 때도 나는 너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했단다." 김박사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너는 자식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두려웠고, 조강지처에게 버림받는 것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것도 두려웠던 겁쟁이었어." 노인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더니 더는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었다.
"사랑하는 아들, 선아. 내 아들아.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모든 억겁의 시간을 끊어버리는 거란다. 너는 수십 번을 태어나도 악마의 고통을 벗어날 수 없고, 송연도 마찬가지야. 그 아이 역시 수십 번 태어나도 또다시 부모에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을 뿐이란다." 김박사는 숨을 몰아쉬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제는 그 고리를 끊어야 해. 세상의 주인이 나타나 모든 것을 가지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찾을 거다."
노인은 김박사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200년이 넘게 돌고 돌아 한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그 예전의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었다. 부질없는 싸움과 끊임없는 욕심과 미련만이 가득했다. 김박사 아니 도민은 무엇이 두려워 세상의 가장 원초적인 악을 가진 존재로 다시 태어난 걸까? 세상이 더는 악마와의 거래가 필요 없을 정도로 망가지면 그때 도민이 얻고자 했던 궁극적인 자유란 도대체 무엇일까? 노인은 참을 수 없는 역겨움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자신 때문에 죽어간 이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은 진정한 자유를 찾았을까?
노인을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전의 속이 비어버린 박제 인간의 의미도 조금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