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든 것을 바꾸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아가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슬픔과 함께 안도감이 느껴졌다. 내가 그녀를 지키지 못했으나 그녀가 자신을 지켜낸 것이다. 40년 동안 사라진 사라진 기억 속에서 다시 깨어난 기억에도 너가 있었다. 어렴풋 기억나는 40년 전 어느날에 너는 분노에 차 있었다.
“너는 또다시 어리석게 기회를 놓쳤구나.” 너의 얼굴에는 피가 가득 묻어 있었다.
“어디가 아픈 거야?” 나는 놀라서 물었었다. 하지만 너는 내 질문과 상관없이 말을 이어갔다.
“나는 더 기다릴 수가 없어. 너는 수백 번을 태어나도 송연을 죽이지 못하겠지. 이제 너는 더이상 다시 태어날 기회가 없이 마지막 생을 살게 될 것이다. 살아서 송연이 사라지고 세상이 불타는 것을 꼭 나랑 함께 보게 될 것이야. 그때까지 세상의 구석에서 눈에 띄지 않는 가장 비참한 몰골로 그 시간을 기다려라. 그리고 내가 다시 너를 찾을 때는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나도 이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나는 너에게 물었다.
“너의 지옥은 이제 시작이야. 선아. 너는 아주 중요한 기회를 놓쳤어. 하지만 나는 너를 용서해. 왜냐하면,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거든. 이제 너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아닌 그저 그런 노인으로만 살게 될 거야, 그건 네가 바라는 게 아니겠지. 너는 지금 당장 죽고 싶으니까. 하지만 기다려. 곧 그녀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올 거야. 그 전에 이승을 고통으로 달구어 나는 더 자라게 될 거고. 너는 나와 함께 세상의 고통 한가운데서 그녀를 기다릴 거야.”
그 순간 나는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몸이 불에 타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정말 타고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소리가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몸도 움직일 수 없었다. 너는 화염에 불타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면 말을 이어갔다.
“나의 형제이자 친구인 선아. 너는 다시 태어난 송연이 스스로 몸을 태워 지옥 불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될 거야. 그녀는 나의 연인이자 너의 연인이지.”
나는 온몸에 지독한 통증을 느꼈지만 이제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알 수 없는 평온함도 느껴졌다. 그리고 내게 웃어주던 한 연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더니 사라졌던 기억 속의 이야기가 조금씩 생각나기 시작했다. 불 속에 손을 넣어 내 얼굴을 만지는 너의 손길이 느껴졌다.
“이제 조금씩 기억이 나? 하지만, 그 기억들을 이제 다 사라질 거야. 말했듯이 너는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서 나를 기다리게 될 거니까.”
그것이 너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발견될 때까지 40년을 노숙인으로 살았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사람들이 던져주는 익숙한 비웃음과 멸시뿐이었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화재와 참사. 그리고 사라진 겨울이었다.
김성준 박사와 이민경 박사는 성덕이라는 무당을 찾아갔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낡고 음침한 사당이었다. 사당 입구에는 ‘단골레’라는 현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골레가 무슨 뜻이야?” 김박사가 물었다.
“전라도에서 무당을 그렇게 부른대.”
“그래? 뭔가 으스스하다.” 김박사를 그렇게 말하고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무당을 불렀다.
“계세요?”
대답 없이 문이 열렸다. 그리고는 초라한 노년의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뉘시오?” 그녀는 특별한 표정 없이 물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선이라는 사람의 부탁으로 왔습니다.” 이박사가 대신 대답했다.
“김선?” 무당을 표정 없는 눈으로 킥킥거리며 대답했다.
“혹시 김선을 아세요?” 김박사는 물었다.
“알지. 그가 당신을 여기로 보낸 건가?”
“네. 지금의 더운 날씨와 오래전에 죽은 아이에 관해서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늦었어. 이제 방법은 없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마지막 퍼즐이 채워질 거야. 송연은 드디어 김선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무당은 더욱 큰 소리로 킥킥거리며 웃었다.
“당신은 완주에서 왔나요?” 이박사가 갑자기 무당에게 물었다.
“그게 왜 궁금하지?”
“영조 때 김선이라는 사람이 살았던 마을이 완주 쪽이라서요.” 무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혹시 새타니가 말하는 세상의 종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김박사가 재차 물었다. 순간 무당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김박사를 한참 쳐다보았다.
“너구나.”
“네?”
“네가 나를 찾아왔구나.” 무당은 또다시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저를 아세요?”
“알지, 네가 올 줄 몰랐는데 반갑구나.”
“네? 저를 어떻게 아세요?”
“언젠간 너를 만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승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도민아.”
“제가 누구라고요?”
“김도민, 김선의 아비. 네가 다시 세상으로 나왔구나. 나는 네가 지옥 불을 나올 수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다시 태어났구나.” 무당은 낄낄 웃었다.
“무슨 말씀인지 자세하게 얘기해주세요.” 김박사는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도민, 선의 아비. 네 마누라도 첩도 다 버리고 자식들조차 지키지 못한 인간. 너로 인해 사신이 태어나고 새타니는 기회를 얻었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잘 들어라. 어리석은 인간아.” 무당은 진지한 얼굴로 김박사를 쳐다보았다.
“너는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무능한 아비에게서 지옥의 사신이 태어난 거야. 너는 오래전에 지옥 불에 던져졌지는데 지금 다시 살아 여기로 다시 왔구나. 너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고 어리석은 네 마누라가 저지른 일조차 눈감아 버렸지. 너는 어느 산중에 짐승의 먹이가 되어버린 네 첫 번째 아이도 찾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너는 지옥에서 벗어나 환생을 하였구나. 혹시 보았느냐? 너의 유일한 핏줄, 초라한 노인이 되어버린 김선을?"
김박사는 갑자기 온몸이 덜덜 떨렸다. 옆에 서 있던 이박사가 그를 부축했다.
“하지만 김선이 이 사람을 여기로 보낸 이유가 있을 거예요. 분명히 당신에게서 답을 찾으라고 했어요.” 이박사가 소리쳤다. 무담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김선은 아직도 송연을 감싸고 있구나. 그 년은 진즉에 죽었어야 했어. 그러면 쓸데없는 목숨들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어리석은 반복은 없었을텐데.”
“방법을 알려주세요. 새타니의 마지막 퍼즐을 막을 방법을요. 부탁드려요.” 이박사는 간절하게 말했다. 지금의 현실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상황이 급격히 나빠질 것이라는 확신을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김박사는 아무런 말이 없이 무당을 쳐다보기만 하였다.
“김박사. 괜찮아?” 이박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김박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갔구나. 새타니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다. 도민이 이곳에 왔으니 이제 준비된 것을 시작할 수 있겠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박사는 점점 다급해졌다. 하지만 옆의 김박사는 조금 전부터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마치 영혼을 버리고 간 빈껍데기처럼 텅 빈 눈으로 무당을 응시하기만 했다. 무당은 천천히 김박사의 얼굴을 만지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너는 지옥의 새타니가 보낸 또 다른 사신이다. 너는 지옥 불에서 타죽어야 했지만 지금은 여기에 있다. 이제 알겠니?”
“무슨 말씀이세요. 김선 어르신이 김박사한테 여기서 답을 얻으라고 했어요.”
“그래 그랬겠지. 김선은 자기 아비를 여기에 보내서 답을 얻으려 했을 거야. 하지만 또 다른 김선을 절대 그것을 용인하지 않아.”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 모르겠나?” 무당은 처음 보는 싸늘한 눈으로 이박사를 쏘아봤다.
“누가 절대 선이고 누가 절대 악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네? 그게 무슨….”
“그 노인네가 이 사람을 여기에 보낸 이유를 정말 모르겠나?” 무당은 다시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키득거렸다.
“지옥 불에서 타죽어야 하는 인간이 환생해서 지금 내 앞에 있다. 이게 무슨 말일 거 같은가?”
“그럼 또 다른 사신이 도민이라는 말씀이세요?”
“그래. 김선은 제 아비가 지옥의 사신의 역할을 하러 다시 태어난 것을 알았어. 여기서 답을 얻으라는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전생의 업보를 갚으라는 거다. 그리고 자신도 죽으면 더 송연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 거지.”
“그럼. 김박사가 해야 하는 것은 자살이라는 건가요?”
“그래. 스스로 사신의 길을 가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 그게 도민이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 자의 얼굴을 보거라. 이놈은 지금 영혼이 없어. 이제 곧 새로운 세상을 위해 새타니의 길을 열어주는 마지막 퍼즐을 맞출 생각 뿐일 거다. 이건 지옥에서 꺼내주는 대가로 가지게 된 이 자의 운명이다. 역시 도민은 여전히 멍청하고 어리석구나. 전혀 변하지 않았어. 이제 시간이 되었으니 그가 하는 일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무당은 갑자기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이박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김박사를 쳐다봤다. 그도 무당처럼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김박사는 천천히 이박사의 목을 잡았다.
“김박사. 왜 이래. 정신 차려.”
“생각이 났어. 그날 일이.”
“무슨 말이야. 정신 차려. 김성준.”
“미안해. 이박사. 내가 해야 할 일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어. 이제 때가 된 거 같아.”
김박사는 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사당 주위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고 그 공간에는 기분 나쁜 웃음들과 이박사의 비명만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