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박사. 지금 연구실로 올래?” 이민경 박사의 목소리는 왠지 신이 나 있었다.
“무슨 일이야? 뭐 좀 알아냈어?”
“장난 아니야. 얼른 와.”
“알았어.” 김성진 박사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이민경 박사의 연구실로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이 미스터리가 조금을 풀렸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것 봐.” 이박사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뭉치가 들어있었다.
“이게 뭐야?”
“이건 새타니에 관한 거야,”
“새타니? 그게 뭔데?”
“쉽게 말해서 어려서 죽은 아기 귀신이지. 근데 새타니 중에는 무당들이 섬기는 동자신 속에 숨어서 사는 지옥신과 같은 존재들도 있거든. 그것들은 언젠가 세상에 나올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전설도 있어.”
“근데?”
“이것 볼래?” 이박사가 서류 속에 그림 하나를 가리켰다. 그림 속에는 불길 속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게 뭐야?”
“내가 자료를 이것저것 보다가 혹시나 해서 금등지사를 찾아봤거든. 김선이 태어날 무렵 가뭄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어서. 근데 거기에 왕의 명령으로 지워진 기록들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 있더라고. 그래서 그게 뭘까 궁금해서 이것저것 또 야사를 찾아봤지. 그러다 이 글을 봤어.”
이박사가 가르치는 곳에는 김선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김선이 태어나던 해에 불길한 일이 너무 많이 생겨서 그 마을 사람이 민원을 넣은 게 있더라고. 저주받은 아이가 태어나서 가뭄이 심해지고 세상이 뜨거워지고 있다. 뭐 그런 얘기였어. 아이에 대한 소문은 임금한테까지 퍼져서 조정에서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나 봐. 그래서 도민이라는 그 아이 아버지가 김선을 살리려고 애를 여염사라는 절에 맡겼대. 그리고는 좀 잠잠한 듯해서 김선이 다시 마을로 돌아왔는데 그때 같이 있던 아이가 송연이라는 거야. 놀랍지? 아마 절에서 같이 자란 아이인가 봐.”
“그래?”
“이 글에 보면 ‘송연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선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적혀있어.”
“음. 근데 혹시 이 둘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아냈어?”
“여기 다음 장을 봐봐. ‘송연은 불에 타 죽었다. 그리고 김선은 삼도천 다리에서 떨어져 지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직 어린아이 모습을 한 또 다른 김선이 있었다.’ 근데, 이게 무슨 의미일까?” 이박사는 몹시 궁금한 얼굴이었다.
“이게 다야?”
“응. 이게 다야. 아무리 찾아도 더는 찾을 수가 없었어. 근데 분명한 건 송연이라는 여자는 불에 타 죽었고 김선이라는 자는 자기가 데리고 다니던 아이랑 함께 사라진 거 같아. 삼도천 다리에서 떨어졌다는 것 보니 나쁜 짓을 하다가 벌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해.”
“혹시 어디서 죽었는지도 알아?”
“아니. 근데 이런 글이 있어. ‘김선이 사라진 마을에는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마천대에서는 알 수 없는 산신의 울음소리가 닷새가 넘게 이어졌다.’ 이 글을 봐서는 마천대는 김선의 고향인 완주에 있는 대둔산 마천대인 거 같아. 물론 정확하지는 않아.” 이박사는 꽤 흥미진진하다는 얼굴이다.
“그래서 이박사의 결론은 뭐야?” 이박사는 김박사의 궁금증을 알겠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는 그 어르신이 또 다른 김선으로 태어난 것으로 생각해.”
“지금 새로 이야기를 만드는 거야?” 김박사는 어이가 없었다.
“글쎄.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어르신을 당장 만나야 하는 거야. 나도 같이 가자. 뵙고 싶어.”
“그 어르신은 살인자일 수 있어. 예전에 아이를 죽이려 했던 범죄자일 수 있다고. 그자 입으로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
“알아. 하지만 그 어르신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없잖아. 그리고 제정신도 아니라면서. 일단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 이야기의 흐름이 그 옛날 김선의 이야기랑 이어지는지도 궁금하고.”
김박사는 어처구나 없었지만 달리 지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김박사는 이박사와 함께 노인을 다시 찾았다. 노인은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김박사는 오늘도 아무 성과가 없다면 노인을 경찰에게 넘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박사는 자기가 노인을 찾아온 이유와 그동안 찾아낸 것들을 노인에게 들려주었다.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사람을 한 명 찾아야 합니다. 그 아이는 예전에 제 손에 죽었어야 했던 사람입니다. 아마 새타니는 마지막 기회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 사람이 송연인가요?” 이박사가 물었다.
“선생님은 지옥의 새타니를 알고 계시나요?” 노인이 물었다.
“네. 들어봤어요.”
“지옥의 새타니는 우리가 아는 아기 귀신이 아니에요. 그들은 인간의 고통을 먹고 조금씩 자라가 어른이 되기 전에 스스로 소멸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예요. 지옥에서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들이 스스로 생존하고 자멸하면서 수천 년을 이어간 요물이지요.”
“그들과 지금의 상황들이 무슨 관계가 있나요?” 김박사는 노인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하지만 노인의 김박사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들은 자멸은 이승과 저승, 그리고 지옥을 위해서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약속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니까요. 그러니 그들의 자멸은 운명이에요. 하지만 몇몇 새타니는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고 소멸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다녔어요. 그리고 알게 되었지요. 새타니가 어른이 되면 소멸하지 않는 다는 것을 말입니다. 소멸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 수없이 많은 새타니가 그것을 원했지만 실제로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답니다.”
“선도 그 새타니인가요?”
“네. 그는 달랐어요. 스스로에게 이름을 붙이며 인간 세상에 깊숙이 들어온 새타니. 그가 바로 김선입니다. 그리고 그자는 자신의 길을 열어줄 또다른 김선도 만난 거지요. 그 사신은 소중한 이를 위해 절대 선으로 되거나 그 소중한 이를 죽여서 절대 악을 탄생시킬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타니는 사신이 그의 가장 소중한 사람을 죽여 그 고통으로 먹고 어른이 되는 마지막 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새타니는 절대 선의 고통이 없이는 절대로 어른이 될 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그 고통은 반드시 마지막 살인을 통해서만 느껴지는 고통이어야만 해요.”
김박사는 이 잔혹 동화 같은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만 노인을 경찰에 넘기고 말장난 같은 이 상황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박사님.” 노인이 김박사를 보고 말했다.
“네?” 김박사는 짐짓 놀랐다.
“날이 상당히 덥지요?”
“네.” 김박사는 노인의 의도를 알 수 없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날이 더워지는 것은 새타니가 어른이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옛날 제가 그의 뜻을 거슬러 잠시 시간을 벌었지만 이제 저는 노인이 되었고 그를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세요?”
“저는 도민의 자식으로 사신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새타니는 저와 함께 새로운 세상으로 가고 싶어 했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화가 난 새타니가 송연을 태워 죽였고 저를 지옥 불에 던져 버렸지요. 그리고 저와 그녀의 환생을 기다렸다가 우리를 만나게 했어요. 송연은 한서아로 다시 태어났고 저는 그 아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 손으로 죽일뻔했어요.”
“한서아라면 혹시 예전에 당신이 죽이려 했던 그 아이요?” 이박사는 놀라서 물었다. 김선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네. 그 아이입니다. 저는 그 아이를 거의 죽일뻔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행히 기회를 놓쳤어요. 하지만 새타니는 정신병원에 갇힌 저를 빼내서 또다시 그 아이를 죽이라고 했어요. 다시 그 아이를 죽일 기회를 준 것이지요.”
“그래서 그 아이를 죽였나요?”
“아니요. 너무 늦었어요. 그 아이는 말기 암환자였고 제가 무엇을 시도할 기회도 없이 죽었어요.”
“그래서 서아가 송연의 환생이라는 건가요?” 이박사는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네. 생각해 보니 서아는 어린 시절 송연의 모습 그대로였어요. 그리고 지금 송연은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어요. 이제 새타니는 그녀의 다음 생을 기다릴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없어요. 아마 그에게는 이게 마지막 기회일 거예요.”
“하지만 어르신은 누구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요.”
“네. 지금은 불가능해요. 하지만 김선은 제 손으로 그녀를 죽일 또 다른 방법을 찾아냈어요. 제가 잊어버린 기억 속에서 그는 그 방법을 계속 찾아다녔죠.”
“그게 무슨 방법이에요.”
“이제 새타니는 거의 어른이 되었어요. 그는 마지막 퍼즐이 필요해요. 절대선의 절대 고통. 그래서 내손으로 송연을 죽이고 절대 고통을 통해 마지막 퍼즐을 맞추려는 거예요.” 김박사는 좀 전과 달리 이 노인의 이야기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김박사님. 성덕이라는 무당을 찾아가세요. 오랜 기간 새타니를 모시던 무당 집안의 자식입니다. 그 무당이 당신에게 답을 줄 겁니다.”
“네? 제가요?” 김박사는 짐짓 놀라며 대답했다.
“네. 반드시 당신이 가셔야 합니다.”
“왜 제가 가야 하나요?”
“그건 당신이 모든 것의 시작이기 때문이에요.” 노인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다시 눈을 감았다. 더 말하기 어렵다고도 했다. 이박사는 김박사에게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둘은 노인의 방을 나서면서 서로 마주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일까? 내가 모든 것의 시작이라니?”
“글쎄, 나도 모르겠어. 근데 그 성덕이라는 무당을 찾아가 보는 것이 맞는 거 같아.”
김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노인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