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박사는 병원을 나와 사당으로 향했다. 그곳은 여전히 낮에도 밤과 같은 스산함이 가득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한기가 느껴졌고 산짐승이 없어도 동물의 사채가 넘쳐나는 소름 끼치는 장소였다. 하지만 김박사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웃음을 지으며 휘파람까지 불러댔다. 그리고는 여러 차례 무당을 불렀다.
"어이. 당골래!" 김박사의 목소리에 방 안에서 잔기침 소리와 함께 조용히 문을 열렸다.
"여긴 어쩐 일인가?" 무당은 몹시 귀찮을 표정이었다.
"왜? 내가 반갑지 않은가?" 김박사는 여전히 휘파람을 부르며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산 중의 뱀이란 뱀을 다 부를 참이야? 웬 휘파람인가?" 무당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김박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걸 어찌 알았는가? 하하."
"뭐라?" 무당은 어처구니없었다. 하지만 김박사의 웃음을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내가 뱀을 부르니 당골래가 나왔구려." 순간, 무당은 그의 농담이 단순한 농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발끝부터 시려오는 귀기(鬼氣) 같은 한기를 품고 있었다.
"당골래야. 나를 기다리지 않았느냐?" 김박사는 무당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무당 흠칫 놀라 뒷걸음쳤다.
"어찌 그러는가? 내가 무서운가? 요즘 말이야. 나는 기분이 참 좋다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무당은 단호하게 말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내가 말이지. 전생의 기억을 모두 얻지는 못했지만 지옥에서의 생활이 조금씩 생각이 나더구나.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지옥에서 참으로 오랫동안 있었지. 거기서 살가죽이 벗겨지고, 불구덩에도 던져지고, 열풍으로 온몸을 말라 비틀어버리는 고통도 끊임없이 겪었단다. 그때의 고통은 나의 정신을 혼미하게 했지만 그 와중에도 한 가지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단다. 그건 내가 왜 여기서 있어야 하는가? 그것이었어. 하지만 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도저히 알 수가 없더라고."
김박사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무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목소리는 소름 돋을 정도로 차분하고 낮았다.
"그러던 중 나와 비슷한 벌을 받던 원귀가 그러더구나. 이제 곧 주인이 나타나 같이 가자 하시면 나의 죄의 시작점을 찾아 제물로 바치라고."
김박사는 얼굴을 무당 쪽으로 더 가깝게 다가갔다.
"나는 그 것이 무슨 말인지 곧 알게 되었단다." 김박사는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한동안 잊고 있었다. 모든 것의 시작을. 너의 간사한 혀가 망치고 멸했던 모든 것을. 새타니가 그러더구나. 지옥의 순서를 바꾸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고. 가장 낮은 곳의 죄인이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세상은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지옥이 아니라고.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이제 무당은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당골래야. 너는 나를 위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제물로 바쳐질 첫 번째 짐승이다. 하지만 걱정은 말아라. 너의 목을 베어 몰골을 추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야. 단지 너의 모든 것이 제물로 바칠 뿐이란다. 정말로 목이 베일 것은 따로 있어. 네가 그걸 못 보다니... 조금은 아쉽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박사는 무당의 팔을 낚아 채어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더욱 소름 돋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지옥의 새타니는 나를 구원하며 이런 말도 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절대 선(善)이 악(惡)으로 돌아서는 순간, 수많은 제물들은 피를 토하며 쓰러질 것이라고. 이제 너를 시작으로 세상의 제물들이 그를 위해 무릎을 꿇을 것이다." 김박사는 무당의 팔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무당의 산자락이 울려 퍼지도록 비명을 질러댔다. 김박사는 무당의 입을 막으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나의 딸아, 참 많은 시간을 돌아 여기에 왔구나. 이제 너는 지옥에서 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무당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 위로 스산한 웃음소리만이 퍼져나갈 뿐이었다.
그는 약속한 시간에 방송국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기 좋은 시간이라는 그 시간에 약속대로 설희를 데리러 왔다. 설희는 그런 김박사를 보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갑게 다가왔다.
"저를 기다리셨나요?"
"..." 설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같이 가실까요?"
"저한테 왜 이러세요?" 설희는 겁이 났다. 지금 이 사람을 따라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해가 지고 달이 뜨기 좋은 날이에요." 그는 또다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설희의 손을 살포시 잡더니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설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차가운 한기였다. 그는 그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더니 차 쪽으로 이끌었다. 설희는 저항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심지어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공포에 질려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듯했지만 김박사는 조금의 망설임과 배려도 없이 그녀를 차 속으로 밀어 넣었다. 김박사와 설희가 탄 차가 방송국에서 멀어지도록 주변의 누구도 그들을 눈여겨보지도 않았다.
경찰은 비상이었다. 산 중에서 시시콜콜한 점괘나 봐주던 늙은 무당이 서울 한복판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노파의 시신이 가죽과 뼈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장기는 누가 태워서 넣은 듯 새까맣게 그을렸지만 시신의 껍데기는 살아있을 때 모습 그대로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 희귀하고 끔찍한 사건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시간, 이박사도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했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박사가 있을 만한 곳은 모두 찾아다니며 그의 행방을 쫓았다. 그리고 뉴스를 통해서 이런 이상한 살인 사건을 알게 되었다. 이건 분명히 김박사와 관련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서둘러 김박사 형을 찾았다. 그만이 유일하게 김박사의 행방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여러 날 동안 그가 출근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박사는 넋 놓고 있을 수가 없었고 수소문해서 겨우 형의 주소를 알아냈다.
그는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는 문 앞에서 여러 번 초인종을 울렸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순간 성덕이라는 무당에게서 느꼈던 섬뜩한 오한이 느껴졌다. 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경비실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가 여러 날 동안 출근을 하지 않아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며 문을 열어달라고 간청했다. 경비원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더니 먼저 경찰에 신고하고 강제로 문을 열자고 했다.
경찰이 도착하자 일행은 함께 김박사 형의 집으로 올라갔다. 그의 집 앞에는 이상한 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생선이 썩는 냄새 같기도 하고 오래 방치된 어망에서 나는 누린내 같기도 한, 정말이지 처음 맡아보는 비린내였다.
잠시 후 드디어 문이 열렸다. 김박사의 형은 소파에 앉아 차분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이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왔지만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경찰은 코를 쏘아 대는 비린내를 참으며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김박사의 형은 섞은 가죽처럼 온몸이 바스러졌다.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건 어디에서도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이박사는 장기를 쏟아내 듯 구역질을 했고, 그 옆에서는 경비원이 실신할 듯 공포에 질려 있었다. 경찰은 누군가에게 분주하게 연락을 하는 모습이었고 지금의 상황이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도 되지 않을 정도로 흐릿했다. 이박사는 참을 수 없는 현기증과 함께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천장이 하얀 어느 방에서 눈을 떴다. 주변에는 푸른색 커튼이 쳐져 있었다. 이박사는 한참을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내 그곳이 응급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 일어났던 상황이 꿈이었나? 그녀는 지금 모든 것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디서부터가 꿈인지, 어디서부터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도 않았다. 그녀는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침대 발치에 서있는 어떤 남자의 모습이 보게 되었다. 단정한 슈트에 호감 가는 인상의 이 남자는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또 난생처음 보는 듯한 이상한 기운을 풍기며 웃고 있었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저음이었다.
"누구신지? 저를 아세요?"
"네. 참으로 현명하고 똑똑하시다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는 김성진 박사님의 친구랍니다." 이박사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처럼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다.
"제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오늘 김박사님의 부탁으로 형님 집에 들렀다가 끔찍한 현장을 보고 말았지요." 그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전혀 끔찍해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경찰 분들이 너무 정신이 없으셔서 제가 박사님을 여기로 모시고 왔습니다."
이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누르며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러고는 그녀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며 속삭였다.
"오늘은 해가 지고 달이 뜨기 참 좋은 날이에요. 이제 모든 것이 시작되는 밤이 될 텐데...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곧 알게 되실 거예요. 그러니 좀 더 쉬세요." 남자는 살포시 미소를 짓더니 이내 뒤돌아섰다. 그리고 두어 발자국을 문 쪽으로 향하더니 다시 발길을 돌려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참, 박사님. 그거 아세요? 김박사님 형님도 장기가 새까맣게 태워져 껍질만 남았다는 것을요. 조금이라도 빨리 발견이 되었더라면 그렇게까지 험하지는 않았을텐데. 원래 처음의 사체는 너무나도 아름답더든요. 그래서인지 저는 이 상황이 너무 안타깝네요."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박사는 세상의 마지막이 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온몸이 공포와 두려움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더니 또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