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고 달이 뜨기 좋은 날, 설희는 성덕의 사당에서 눈을 떴다. 극도의 공포가 몰려왔지만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 곧 시작이에요."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송국으로 설희를 찾아오던 젊은 청년의 목소리.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청년의 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설희의 머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이제 곧 끝나요. 긴 시간을 돌아왔으니 마지막은 조금 서둘러도 괜찮겠지..." 그는 잠시 더 설희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손으로 설희의 눈을 가리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은 참 어려워요."
그는 설희의 눈을 가린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고 그녀는 점점 눈앞이 흐려졌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그의 말에 설희는 극한의 공포를 느꼈지만 손가락 하나조차 까딱할 수 없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밖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의 시야도 조금씩 밝아지고 몸도 조금씩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설희는 사당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문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놀랍게도 눈 앞에는 오물 냄새와 지저분한 사람들로 가득 찬 조선시대 길거리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설희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그들 속으로 걸어갔다. 이 드라마 세트장 같은 곳을 벗어나려면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분주하게 오고 갈 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설희는 점점 마음이 급해졌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고 도대체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두려움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설희가 놀라 돌아보니 작은 남자아이가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다.
"너는 누구니?"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을 잡고 한참 전통 혼례가 진행 중인 어떤 집으로 데리고 갔다. 한눈에 봐도 병약해 보이는 신랑과 오방색의 혼례복을 입은 신부가 보였다. 여느 혼례와 다름이 없지만, 또 여느 혼례처럼 들떠보이지도 않는 참으로 이상한 풍경이었다.
"여기는 왜 온 거야?" 설희는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설희의 눈을 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기억하고 있어?" 아이는 생각보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뭘?"
"너는 김선과 함께 하는 삶을 위해 나와 약속을 했었잖아. 그래서 너의 부탁도 들어줬던 거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너랑 무슨 약속했다는 거야?" 설희가 어이없는 듯 말하자 아이는 손가락으로 신부를 가리켰다.
"저 아이는 송연이야. 기억해? 선의 정인(情人). 송연은 내게 부탁했었지. 자신의 혼례를 막아달라고. 그렇게만 해주면 자신의 영혼을 바쳐 나를 도와주겠다고."
설희는 신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혼례복으로 휘감겨 잘은 보이지는 않았다. 설희는 그녀를 자세하게 보고 싶어 대례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순간 신랑이 피를 토하고 쓰러졌고 구경하던 사람들도 하나 둘 구역질을 하며 쓰러졌다. 순식간에 혼례식장이 아비규환이 변했다.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넘어지고 밟히며 비명소리도 가득했다. 하지만 설희의 손을 잡은 아이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이제 기억이 나?" 설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이를 쳐다봤다. 좀 전까지 말짱하던 아이의 온몸이 피로 덮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설희는 또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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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진 박사가 다녀간 다음 날, 대둔산 마천대에서 수백 마리의 동물 사체가 발견되었다.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동물들이 모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사체는 모도 까맣게 태워져 있었고 인터넷에서는 악마의 종교의식이라는 루머가 나돌았다. 사람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이성을 잃은 사람들은 길거리에 넘쳐 났고 경찰조차 감당할 수 없는 폭동이 여기저기에서 마구잡이로 발생했다. 연일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극한의 공포로 사람들을 몰아넣은 것이다.
이박사는 김박사 말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나를 쳐다보던 눈, 내 아들을 비웃던 눈, 우리를 경멸하던 눈, 그 눈을 바치는 의식'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이박사는 더는 혼자서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었고 의논할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마땅히 생각이 나는 사람도 없었다. 또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 일단은 노인을 찾아가기로 결정하고 가방을 챙겨 현관문을 나섰다. 그 순간 문 밖에서 김박사가 나타났다. 그는 마치 내가 집을 나선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가방을 빼앗아 집 안으로 던져 넣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어?" 이박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부터.. 어디 가려고?" 김박사가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어르신을 뵈려고. 병원은 괜찮은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박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박사는 집안으로 아무렇지 않게 들어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요즘 신경 쓸 일이 많아서 피곤하네." 김박사가 또다시 웃었다.
" 지금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 이박사는 두려움을 감추며 물었다.
"뉴스에 나온 불에 탄 사체를 말하는 거야? 아니면 눈의 제물을 말하는 거야?"
"둘 다..."
"보는 그대로야.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통해 지혜를 얻어 왕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일천번제를 통해 더 이상 세상을 보는 눈을 잃었어. 스스로 지옥의 문을 열어버린 거지. 사람들이 세상의 공포만 볼 뿐, 거기에 가려진 진실이나 마음은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일까..." 김박사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이것이 생각의 제물이란 말이야? 짐승을 태워 죽이는 거?" 이박사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박사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조용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의 따뜻한 손은 더욱 소름끼쳤다.
"민경아." 김박사가 이박사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너의 공포와 분노는 잊지 마. 이건 오랜 시간 동료이자 친구였던 너를 위해 마지막으로 베푸는 나의 친절이야.오늘의 눈물을 꼭 기억해." 김박사를 그 말을 남기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그의 말대로 세상은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활기차던 길거리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고 사람들의 눈에는 공포와 두려움 뿐이었다. 사이비 광신도들의 자살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학교도 상점도 길거리도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이다. 귀, 코, 몸의 제물이 남았다. 혀는 새타니의 복수처럼 느껴졌고 생각과 눈은 악마의 의식 같았다. 이제 남은 세가지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박사는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기로 결심하고 컴퓨터를 켰다. 인간의 죄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유식사상(唯識思想). 이것은 6가지 제물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혀를 죽여 새타니의 비밀을 막았고, 어리석을 생각을 심어 현실을 곡해하게 했고, 눈을 가려 인간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제 남은 감각은 코와 귀와 몸이다. 이박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두려움에 떨고만 있으면 세상은 곧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현관문을 열었다.
설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성덕의 사당에 있었다. 사라졌던 시야도 돌아왔고 몸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설희는 천천히 일어나 창호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더는 드라마 세트장 같던 조선시대의 모습은 없었다. 그저 어둡고 스산한 숲 속 뿐이었다. 설희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당장 어떻게 여기를 떠나야 할지 막막했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 이내 숲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어떻게 된일인지 발이 바닥에 묶인 듯 사당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아무리 힘을 줘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고 설희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살려달라고 울며 소리쳤다. 하지만 어두운 숲 속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고 설희는 점점 힘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아직은 기다려야 해요."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설희가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직 기다려야 해요. 그래도 오래 기다리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청년의 말에 설희는 갑자기 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찬찬히 바라보더니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김선. 너는 지옥에서부터 나를 따라왔구나."
그녀의 말에 청년은 조용히 웃었다.
"이제 모두 기억이 나는구나. 너는 이제 우리의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다. 그것은 오래된 약속이니 반드시 지켜야 한다."
"새타니. 어리석은 아이의 마음을 가진 악마. 너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을 몰랐다."
"나는 너를 오래 기다렸다. 너의 환생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 사랑하는 나의 송연. 우리는 이제 모두 함께할 때가 되었어." 청년의 말에 설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일천번제: 1,000마리의 짐승을 불태워 제사 드렸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