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거의 끝났어." 청년은 긴 한숨을 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노인은 마주 앉은 청년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모습은 젊은 시절의 자신과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그래. 거의 끝났어."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어?" 청년의 말에 노인은 주위를 둘러보았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은 어느 형상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날, 너는 나를 배신했지. 아마도 의령수(衣領樹)에 걸릴 죗값이 지금 너의 죽음보다는 가벼울 거야." 청년은 피식 웃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선아..." 노인은 나직하게 청년을 불렀다.
"너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도 파괴에 집착하는 것이냐?" 노인의 질문에 청년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노인을 흉내 내며 되물었다.
"파괴? 이건은 삶이지 파괴가 아니야. 그러면 너는 무엇을 위해 이다지도 어려운 길을 택하는 것이냐?" 노인은 어깨를 으쓱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의 친구이자 유일한 형제인 선아." 청년은 조용히 노인을 다시 불렀다.
"우리는 둘 다 선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어. 하지만 그 누구도 세상의 기준에 맞는 선을 베풀지는 못했어. 너의 젊은 날은 비참했고 고독할 뿐이었으며, 누군가에게는 지독한 고통을 주며 살았지. 그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그런 네가 왜 선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는지 궁금하지 않아?" 청년의 물음에 노인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주위를 봐봐. 여기는 수많은 인간들의 죄를 묻는 곳이야. 너는 네 죄의 무게를 생각해 본 적이 있어?" 노인은 말없이 암흑 뿐인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보이는 형상이라곤 청년뿐이었다.
"나의 친구이자 형제였던 너는 이곳에서 영원한 삶을 약속한 나를 저버렸어."
"그랬지..." 이윽고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 옛날, 송연과 함께하게 해 주겠다는 너의 말에 속아 어리석은 약속을 했어. 너의 삶을 구원한 제물을 바치겠다고. 그것이 송연인 줄도 모르고 너를 믿었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스스로 죽여 너를 막을 수밖에 없었어." 노인은 덤덤하게 말했지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알아. 너의 고통을..." 청년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말했지만 노인은 또다시 지독한 역겨움을 느꼈다.
"그리고 너는 벽온단을 태우듯 송연을 태워버렸지." 분노가 섞인 노인의 말에 청년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랬지. 나는 그 순간을 지금도 후회해. 그때 아름다운 형상만은 남겼더라면 내재된 공포의 파국을 좀 더 만날 수 있었을텐데."
"그래서 지금은 사람들의 껍데기를 남기고 태우는 건가?" 노인의 목소리가 짐짓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 모두 타서 사라지는 것보다 텅 빈 아름다움을 남기는 것이 더 두렵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거든."
"이제 말해줘. 왜 이렇게 나에게 집착하는지." 노인은 잠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 청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 선아. 너는 그것을 알고 있느냐? 인간은 선과 악이 공존해야만 완성된다는 것을." 그리고는 손을 뻗어 노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절대 선으로 태어났지만 사회의 악으로 자랐고, 나는 악마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누구보다 친절하지. 인간은 선과 악의 조화를 통해 삶을 영위하는 미천한 존재야.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절대 진리이자 네가 필요한 절대적인 이유이지. 절대 선과 절대 악이 만나는 가장 중요한 지점에 너와 내가 함께 있는 거란다. 이해할 수 있어?" 청년은 활짝 웃었다. 세상의 가장 어두운 존재의 가장 밝은 웃음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그래. 나는 선한 인생을 살지 않았어. 그것이 나에 대한 집착과 무슨 상관인가?"
"선아, 너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선과 최악의 한가운데에 태어난 존재이자 완성된 희로애락(喜怒哀樂)이야. 자식을 갈망하는 부모의 선과 남의 자식을 죽이는 절대적인 악이 공존했고, 탄생의 기쁨과 상실의 고통이 공존했고, 시기와 질투, 사랑과 죄악이 모두 공존했던 그곳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존재. 그게 바로 너야. 너의 마지막 악행과 그것을 통해 네가 겪게 될 지독한 고통과 기쁨이 나는 정말로 필요했어. 마치 마지막 퍼즐처럼. 하지만 선아. 상황이 조금 바뀌었어. 다시는 태어나지 못할 지옥 속에 있을 줄 알았던 도민이 돌아왔어. 그의 인간적인 나약함이 또 다른 길을 열어줄거야. 정말 아름답지 않니? 네가 도민의 손에 마지막 제물이 된다는 것이..." 청년은 다시 한번 소름 끼치게 웃었다.
"마지막 제물..." 노인의 말에 청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서서히 눈앞에서 사라졌다. 노인은 몸에 갇힌 의식으로 청년을 만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뼛속까지 느껴지는 차가운 고통은 피할 수 없었다.
김박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산책은 늦은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세상은 얼마 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지만 그 모습이 나름 마음에 들었다. 도시는 주제 사라마구가 만든 '눈먼 자들의 도시'의 한 장면 같았다. 주위에는 역겨운 냄새와 오물이 넘쳐났고 곳곳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새타니가 만든 풍경은 생경하면서도 세상도 나와 같이 고통을 받는다는 것에 묘한 만족감도 느껴졌다.
'지독한 악취와 공포의 비명, 귀와 코의 제물이 완성되었구나. 도시의 저주와 악령의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 이제 그를 만날 순간이다.' 김박사의 입술 사이로 묘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의령수(衣領樹): 불교의 삼도천 다리에서 초강대왕을 만나러 가기 전 사자의 옷을 걸어 죄의 무게를 달아주던 나무
***벽온단 (辟瘟團) : 전염병을 물리쳐 막는다던 알약. 내의원에서 만들어 임금에게 낸 것을 임금이 설날 첫새벽에 불에 태우는 의식이 있었음
***눈먼자들의 도시 : 포르투칼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시력을 잃는 전염병이 창궐해 사회가 붕괴하는 과정을 묘사한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