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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yj Sep 01. 2024

돌이킬 수 없는 시간, 다시 만날 수 없는 너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시간이고, 우리는 다시는 만날 수 없어."


이름만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 누군가가 나에게 했던 말이다. 그것은 내 선택으로 이해 우리의 인연은 다시 이어질 수 없음에 대한 그 사람의 경고였다. 그때의 나는 잔인했고 그와는 어떠한 형태의 인연으로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을 돌이켜 인연들을 소중하게 여기기 않았던 나에게 그런한 선택들은 스스로를 몹시 외롭게 할 거라는 경고와 질책을 하고 싶다.


'회피형 애착(avoidantstyle)'  성인들의 애착이란 양육기에서 성인기로 연결되며  ‘자기’와 ‘타인’에 대해 불안과 의심을 가지며 정서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으로 누구를 만나든 깊은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피형 애착은 불안과 회피로 구분되기도 한다. 즉, 불안은 거절이나 버림에 대한 두려움, 타인에 대한 과도한 욕구 등이 원인이고, 애착 회피는 친밀에 대한 두려움, 의존에 대한 불편함, 과도한 자기 의존성 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Fraley&Waller,1998). 하지만 불안이든 회피든 이러한 애착관계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나 또한 불안정한 어린 시절이 문제였는지 알 수 없지만 상당기간 이러한 인간관계를 고집했다. 연인은 만나도 가장 많이 물은 것이 "왜 내가 좋아?"라는 나에 대한 불신이자 상대에 대한 의심이 가득한 질문들이었다. 물론 관계가 깊어지만 상처가 두려워 먼저 이별을 고하기도 일쑤였다. 그것은 상대가 싫어졌다는 표면적 이유였지만 실상은 불안에서 도망가고자 하는 어쭙잖은 변명에 불과했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불편하면 어울리지 않았고 지나친 친밀함도 꺼렸다. 생각해 보니 나의 청춘의 애착관계는 잦은 이별과 회피로 깊은 인간관계는 없었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깊은 인간관계를 피하며 스스로의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문득문득 나의 마지막을 생각한다. 시끌벅적한 장례식은 기대하기 어렵더라도 고독사라는 거창한 단어는 피하고 싶은 것은 욕심일까? 최철주 작가(2024)의 "고독사를 준비 중입니다"라는 책에서는 생의 마지막을 온전히 홀로 스스로의 삶과 죽음을 맞닥뜨릴 줄 아는 용기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혼자가 두렵다.


통계에 따르면 2023년 상반기에만 고독사로 사망한 사람이 2,658명이었고 이는 5년 전 비해 약 2배 증가한 수치라고 한다. 나는 여전히 2,658명에 포함되고 싶지 않다.


혼자가 좋은 세상에서 우리가 맺어가고 있는 인연들은 어떠한 형태일까? 우리는 정말 온전히 혼자인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세상은 더 많은 관계를 차단하고 있다. 우리는 기계로 주문을 하고 AI로 대화를 하며 회의도 ZOOM이 편하다. 사회는 더 많은 인간관계를 원하지 않게 되었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회가 만든 회피형 애착관계들도 늘어만 간다. 그에 따라 우리들의 외로움도 늘어만 간다.


아직도 나는 사람들이 어렵고 상처가 두렵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수많은 관계를 떠나지 않는다. 물론 그 관계수만 가지의 감정들로 지속적인 피로감과 허탈함도 느끼게도 한다. 그래도 나는 관계를 놓을 수는 없다. 간을 돌이켜 떠나버렸던 인연들을 아쉬워하며, 더이상 깊어지질 않을 짧은 인연들을 반복하며... 그렇게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도움을 주고받으며 웃고 울며 살아가야 한다. 회피형 애착이라도 끈을 부여잡고 살아가야 하는 것인 인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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