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전쟁의 호르무즈 해협 항해기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검은 피

by 최경열

거대한 화약고, 30만 톤의 심장

30만 톤의 원유를 가득 채운 유조선 '여수1호'(가칭)가 호르무즈 해협의 초입에 들어섰을 때, 바다는 죽은 듯 고요했다. 하지만 그 정적은 폭풍 전야의 비명보다 더 날카로웠다. 바레인에서 채운 15만 톤에 이어 나머지 절반까지 꽉 채운 선체는 해수면 깊숙이 몸을 낮췄다. 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묵직한 엔진의 진동은 마치 거대한 짐승의 신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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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만선(滿船)이 된 유조선은 그 자체로 유람선도, 화물선도 아니다. 그것은 **'떠다니는 거대한 전술 핵폭탄'**이다. 누군가는 이 검은 액체를 배럴당 달러로 계산하겠지만, 우리에게 이것은 대한민국의 '검은 피'다.

방구석의 전등 하나, 편의점의 삼각김밥을 실어 나르는 트럭, 차갑게 식어가는 공장의 라인... 이 모든 것의 명줄이 지금 내 발밑에 깔린 30만 톤에 걸려 있다. 원유 의존도 100%, 그중 80%가 지나는 이 좁은 목구멍이 막히는 순간,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유기체는 뇌사 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야만 한다. 죽음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이 해협을 향해.


미사일의 궤적과 붉은 바다

"전방 2마일, 미확인 고속정 접근 중! 우현 30도, 회피 기동!"

조타실의 불빛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오직 레이더의 푸르스름한 안광만이 항해사의 퀭한 얼굴을 유령처럼 비췄다. 최근 뉴스에서 본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스라엘의 공습과 이란의 보복 선언, 그리고 홍해를 장악한 후티 반군의 드론 공격. 이제 호르무즈는 단순한 항로가 아니라 세계 3차 대전의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현장이다.

적들의 타깃은 명확하다. 배를 침몰시키는 것보다, 브리지(조타실)와 기관실을 타격해 배를 '식물인간'으로 만드는 것. 언제 어디서 '가미카제 드론'이 날아와 유리창을 뚫고 들어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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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실 깊숙한 곳에서 나는 전해오는 진동만으로 상황을 짐작해야 했다. 2등 기관사인 내 손에는 렌치 대신 워터 캐논(Water Cannon) 조종기가 쥐어졌다. 선체 외곽을 따라 배치된 고압 방수포들이 분당 수 톤의 해수를 뿜어내며 드론의 진입로에 거대한 물벽을 만들었다. 물리적인 타격과 전자전이 뒤섞인 기묘한 전장이었다.

전 선원은 거주구역에서 200m 떨어진 선수 '보승스토어'로 대피했다. 로프와 공구들이 뒤엉킨 그 좁고 매캐한 창고 안에서, 우리는 구명조끼를 생명줄처럼 움켜쥔 채 서로의 거친 숨소리를 들었다.

"쾅-!"

멀지 않은 곳에서 둔탁한 폭음이 들렸다. 배 전체가 비명 지르듯 흔들렸다. 대함 미사일인가? 아니면 기뢰인가?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기도를 시작했다. 죽음의 공포는 짠내 섞인 로프 냄새와 함께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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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위의 별빛, 그리고 링링

잠시 정적이 흐른 사이, 나는 홀린 듯 선수 포카슬데크로 나갔다. 타이타닉의 주인공들이 자유를 외쳤던 그곳에서 내가 본 것은 '현대판 지옥도'였다.

수평선 너머, 미사일에 피격된 다른 유조선 한 척이 거대한 횃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검은 연기는 밤하늘의 별을 집어삼킬 듯 솟구쳤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지옥 같은 불꽃 위로 별들은 무심할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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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종파, 그리고 강대국들의 이권이 얽힌 이 미친 전쟁터에서 우리는 그저 운 좋은 생존자가 되길 빌 뿐이다. 그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나는 엉뚱하게도 싱가포르의 화려한 야경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불빛 아래 나를 기다리고 있을 화교 여인, 링링을 생각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떠오르는 이름은 결국 하나였다. 링링과 보트 키(Boat Quay)에서 마셨던 맥주의 서늘함, 습한 공기 속에서도 따뜻했던 그녀의 손길. 전쟁의 화염보다 내 망막에 선명하게 박힌 건 그녀의 웃음이었다.


사선을 넘어 여수로

"총원 이상 무. 호르무즈 최협로 통과 중."

무전기 너머 들려오는 선장의 낮은 목소리에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멀리서 우리를 호위하는 미 항모 전단의 실루엣이 거대한 성벽처럼 나타났다. 그제야 엔진 소리가 경쾌한 심장 박동으로 바뀌어 들렸다.

나는 2등 기관사다. 감상에 젖을 시간은 짧다. 이제 배의 심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한다. 이 30만 톤의 원유는 대한민국 일주일 치의 생명줄이다.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조국의 불빛 하나가 꺼진다. 그 사명감이 기름때 묻은 렌치를 쥔 손등에 핏대를 세우게 했다.

이제 우리는 인도양의 넓은 품으로 접어들 것이다. 싱가포르에 기항하면 가장 먼저 그녀에게 편지를 보낼 것이다. 아직 부치지 못한, 하지만 내 생존의 기록이자 지독한 사랑의 증거가 될 그 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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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링링에게,

이 편지가 당신에게 닿을 수 있을지, 아니면 내가 실은 이 검은 원유와 함께 바닷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영원히 읽히지 않을 기록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내 주위는 온통 죽음의 냄새로 가득합니다. 뜨거운 엔진 열기, 매캐한 기름 냄새, 그리고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미사일과 드론에 대한 서늘한 공포가 나를 조여오고 있습니다.

방금 전에도 배 근처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렸습니다. 30만 톤의 유조선이 종잇장처럼 흔들릴 때마다, 내 심장도 함께 멎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곳은 지옥입니다, 링링. 하늘에는 별 대신 죽음을 싣고 날아다니는 기계들이 떠다니고, 바다 아래에는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차가운 기뢰들이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링링, 이 처절한 공포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사명감도, 강철 같은 용기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당신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입니다.

폭격의 화염이 밤하늘을 붉게 물들일 때마다, 나는 눈을 감고 우리가 함께했던 싱가포르의 그 밤을 떠올립니다. 보트 키의 시원한 맥주 향기, 내 손을 잡아주던 당신의 보송보송한 온기, 그리고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던 당신의 눈매... 그 기억들이 지금 내 방탄조끼보다 더 단단하게 내 심장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배에 실린 기름이 대한민국의 명줄이라고. 하지만 나에게 이 배는 당신에게로 가기 위한 거대한 배일 뿐입니다.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당신에게 전하지 못한 내 진심도, 사물함 속에 숨겨둔 작은 보석함도 모두 검은 바다 아래 잠겨버리겠지요. 그 생각만 하면 죽음보다 더한 공포가 밀려옵니다. 당신을 다시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내게는 가장 큰 전쟁입니다.

링링, 약속합니다. 나는 반드시 이 죽음의 해협을 뚫고 나갈 것입니다. 엔진의 굉음이 비명처럼 들릴 때마다 당신의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겠습니다. 이 지옥 같은 전장의 불꽃이 아무리 뜨거워도, 당신을 향한 내 그리움보다 뜨거울 순 없습니다.

곧 싱가포르에 기항합니다. 그때 이 편지를 직접 건넬 수 있기를, 그리고 당신의 품 안에서 이 지독한 전쟁의 공포를 씻어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당신이라는 유일한 항구를 향해, 나는 오늘도 사선을 넘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오직 당신만을 생각하는 오빠 "


20대의 청춘, 링링 그리고 사명감

나는 이제 겨우 20대 초반의 젊은 총각이다. 국가에서는 일정 기간 승선하는 조건으로 군 면제 혜택인 '승선근무예비역' 특례를 주었다. 총 대신 기름때 묻은 렌치를 잡고 있지만, 이 위험한 바다를 지키는 것 또한 군 복무 못지않은 막중한 임무임을 절감한다.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조국의 불빛 하나가 꺼진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웠다.

별빛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며 싱가포르의 화교 여인, 링링을 생각했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순간에 떠오르는 이름은 결국 하나였다. 링링. 그녀와 싱가포르 센토사섬의 어느 노천 바에서 마셨던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간절했다. 습한 열기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잡으면 느껴지던 그 보송보송한 온기. 방콕의 시장통을 헤치며 함께 웃던 그녀의 눈매는 이 살벌한 전쟁터의 화염보다 훨씬 선명하게 내 망막에 박혀 있었다.


밤하늘의 별 하나가 유독 반짝였다. 링링의 눈동자를 닮은 별이었다. 나는 미사일이 그리는 죽음의 선을 보며,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전쟁은 인간의 증오가 만들었지만, 이 지옥을 견디게 하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향한 지독한 사랑뿐이었다.

전장의 불꽃보다 더 뜨거운 그리움이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나를 믿고 기다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죽음의 해협을 통과해야만 했다

나는 2등 기관사다. 이제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끝났다. 배의 심장을 돌려야 한다. 뜨거운 열기와 소음이 가득한 기관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30만 톤의 원유와 대한민국의 미래, 그리고 나의 사랑을 싣고 이 사선을 반드시 뚫고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