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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Jun 27. 2024

사랑이 일탈이라면

사랑에 대하여 5: 마무리하며

  형태소 활동을 통해 내 나름대로 사랑에 대해 정의할 수 있을까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몇 권의 책을 읽고, 몇 편의 글을 썼다고 해서 사랑을 이전보다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지도 않고, 기존의 내가 사랑에 관하여 고찰했던 것에서 크게 달라진 것 같지도 않다. 생각보다 내 사랑관은 편협하고 뚝심이 있었나 보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을 정의 내리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사랑을 정의하는 역할은 그에 대한 능력도, 책임도 없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학계에서 인정받는 철학자나 국어학자에게 있을 것이다. 혹은 어느 저명한 뇌과학자의 몫이거나.


 그래서 나는 이 글을 내 개인적인 경험과 고찰에 근거해서 작성해보려고 한다. 글을 쓰기에 앞서서 사랑의 본질로 향하는 경로에서 조금 벗어나 내가 써온 글들을 메타적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글을 찬찬히 읽다가 깨달은 하나의 사실은 내 글의 대부분이 “삶은 곧 고통이고, 사랑은 이를 견디게 해주는 기제”라는 것을 기본 전제로 삼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랑에 대한 나의 상념을 이미지로 치환한다면 사랑이란 삶이 주는 고통이라는 큰 갈래에 샛길로 존재하는 무언가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보면 사랑은 삶이 주도하는 고통의 질서에서 어긋나는 뱡향으로 이끄는 길은 아닐까. 한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이 삶이 가지는 본래의 구조적 기능에서 탈선하게 하는 것이라면. 즉, 사랑이 삶에 있어서 일탈이라면.


 그렇다면 삶의 속성에 대해 우선적으로 살펴보면 사랑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우선 삶은 시간성이라는 물리 법칙에 종속되기에 선형적이다. 삶의 주체인 인간은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고, <자기 앞의 생>의 ‘로자 아줌마’처럼 인간 존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노화하고 육체로부터 기인하는 한계에 갇힌다. 이렇게 나약한 인간에게 있어서 삶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밝은 밤>에서 언급되듯이, 이러한 삶 속에서 물리 법칙은 “얼어붙은 강물”이고, “인간의 자유의지나 선택이라는 것 또한 커다란 환상”일지도 모른다. 정말 인간의 의지가 환상이라면, 인간 존재에 우월성을 부여한다고 간주되던 자유의지가 사실은 삶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의 자기 최면에 불과하다면, 삶의 또 다른 속성은 필연성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삶 속에서 사랑이 일탈이라면, 그래서 삶의 속성에 반한다면, 사랑의 속성은 비선형적이고 우연적이지 않을까.


 내가 사랑을 체감했던 순간을 떠올려본다. 20대 초반의 나는 조금 유난스러운 성격이어서 남들보다 유달리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럼에도 곁을 지켜주던 사람은 있었는데, 당시의 내 마음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기에는 여력이 없었기에 그저 다가와준 사람을 잡았을 뿐이었고, 운이 좋게도 그 사람은 이런 나에게 잡혀주었다. 그렇게 사랑 없는 사랑을 붙잡던 중, 하루는 그 사람이 내 자취방에서 잠에 든 적이 있었다. 그 시절의 밤이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암막 커튼을 살짝 걷어 창문을 열고서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다 갑자기 배달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녀가 잠에서 깨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에 침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오토바이가 자취방 창문 앞을 지나가며 암막 커튼 사이로 헤드라이트가 불빛을 흩뿌려댔고, 빛은 그 사람의 얼굴에 가닿았다.


 빛이 잠든 그녀의 얼굴 위로 찰나의 시간 동안 머물렀고, 나는 처음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예쁘다.” 따위의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정도지만. 오토바이가 멀어지고 엔진의 파동이 옅어져도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빛의 잔상이 남아 있어서 담뱃불이 꺼진 후에도 책상에 턱을 괴고는 잠시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간혹 누군가를 만나 첫눈에 반했을 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는 상투적인 표현을 듣고는 하는데, 나 역시도 그때는 빛이 소리보다 빠르다는 자명한 물리 법칙이 실은 전부 헛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느 연인들의 결말이 그러하듯 나와 그 사람도 생각지도 않은 이유들과 기억도 못할 사건들로 헤어졌지만 그때의 일은 지금도 문득 떠오른다.


 다시 삶과 사랑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어쩌면 앞서 언급한 단편적인 일화가 나로 하여금 사랑을 삶의 일탈로 규정했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 사랑이 삶과 거기서 비롯되는 고통에 대한 반향이고, 물리 법칙을 벗어난, 비선형적이고 우연적인 무언가라고 가정한다면, 그날의 기억은 이 가정에 부합하고, 나에게 있어 사랑으로 남기에 충분하다. 비록 개인적인 경험이라 설득력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고단했던 20대 초반을 보낸 나의 삶에서 사랑은 이 기억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그때의 일화와 가장 가깝다. 이는 현재 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딱 그 정도로만 의미 있다. 우연히 암막 커튼 사이로 새어든 빛에 눈이 부실 정도로만.


 그렇다면 세상은 어떨까. 삶이 개인의 내부에 위치한다면 세상은 외부에 있다. 세상은 삶보다 크다. 세상은 여러 존재들이 얽히고설킨 장이며, 한 개인의 삶은 여기에 속한 부속에 지나지 않는다. 줄곧 삶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사실 사랑의 대상은 주체의 외부에 놓인다. 심지어는 자기애마저도 대자적인, 즉 객관적인 외부의 시선에서 자기 자신의 주관을 바라봐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일탈을 위해서는 기존 노선에 대한 반작용이 요구된다. 그래서 일탈로서의 사랑 역시도 삶을 전제하되 그것이 유발하는 내파에서 탈피하기 위한 운동이다. 요약하자면, 삶에 있어서 사랑은 삶이 추동하는 내부 작용을 거부하며 외적인 대상을 전제해야만 하는 일탈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사랑의 대상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며, 사랑의 역학에 있어서 방향성 역시도 외부를 향해야만 한다. 앞 문단에서도 말했지만, 이 외부는 삶이 아닌 세상에 있다. 이제 앞서 말한 삶, 사랑, 그리고 이외의 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이 세상에서 사랑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우선, 사랑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들은 무한하다. 누군가는 이성을 사랑하고, 누군가는 동성을, 아니면 반려 동물이나 자신을, 심지어 어떤 이는 관측할 수 없는, 혹은 지칭할 수 없는 대상마저 사랑할지도 모른다. 이렇듯 세상에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은 도처에 산재해 있고, 그래서 예전에 내가 <밝은 밤>을 읽은 후 작가노트에 적었던 글귀처럼 어디에나 사랑은 존재할 수 있다.


 사랑은 어떤 형태를 하고 있을까.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무한정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랑이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다. 당장 주위를 둘러봐도 사랑에 실패해서 눈물 흘리는 누군가가 있고, 매일같이 우울한 소식들을 읊어대는 신문 기사들을 보더라도 과연 이 세상에 사랑이 실제로 있는지 의구심이 들 지경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할 수 있는 대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무한하니까. 그래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모습으로든 실재한다. 그렇다면 세상이 품은 사랑은 가능성의 양태를 띨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랑의 대상은 분명히 실재함에도 그것의 성취나 실현에 있어서는 각자가 분명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 주장을 요약하자면, 나에게 있어 사랑이란 삶이 가하는 폭력을 감내할 수 있게 하는 일탈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삶의 속성, 즉 물리 법칙의 선형성과 필연성을 벗어나 비선형적이고 우연적인 속성을 가진다. 또한 사랑은 삶이라는 내적 영역에서 탈피해야 하므로 그 대상이나 지향은 외부를 향한다. 외부,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사물, 혹은 비사물마저도 사랑의 대상이 될 자격을 갖추지만, 모든 사람이 사랑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사랑의 형태가 가능성의 모습을 띠기에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세상과 삶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세상과 한 인간이 경험하는 삶의 관계를 간략히 비유하자면, 넓디넓은 꽃밭에 놓인 사형수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랑은 꽃내음 정도가 될 것이다. 약간의 환각 효과가 있는.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우리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죽음이라는 운명을 맞이해야만 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사형수가 두 발로 밟고 있는 이 세상은 꽃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삶에 의해 고통받는 지금도 세상에는 사랑받아야 할 것들이 널려 있고, 가능성의 모습을 한 사랑은 만개할 준비를 한 채 숨죽이고 있다. 비록 삶은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지만, 언제 꽃 피울지도 모를 이 사랑 덕분에 딱 살 수 있을 만큼의 여지를 준다. 그래서 결국 지금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아직 사랑이 도달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그리고 그들 모두가 겪을 삶의 보편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우연히도 세상은 이렇게나 아름답다.



by.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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