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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May 17. 2024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花樣年華

“이제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핵무기 실험을 참관한 후 자신의 소회를 (실제로) 한 줄로 표했다.

돌이켜보면 이는 냉전시대의 가장 중요한 모순을 예고한 것만 같다. 핵은 ‘절대반지’와도 같지만, 그 누구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극단적 파괴력을 지닌 핵이기에, 생존에 극히 위협을 주는 상황이 아니라면 이제껏 어떤 목적으로 활용되지 못해왔다.

과거에는 신무기(혹은 신기술)가(이) 개발되면, 당연히 군대에 도입하고 (군 내) 전략가들이 그 무기를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도록 독트린을 수립했다. 다만, 핵무기의 등장과 함께, 강대국들은 전략적 차원과 도덕적 차원에서 그 무기의 사용이 불러올 결과를 공론화하고 심도 있게 논의하는 행보를 보였다.

아이젠하워 시기 1955년 대만해협 위기 때 대량응징보복(massive retaliation)을 제시한 적을 제외하고, 미국을 포함한 여타 국가들은 ‘핵무기 사용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적 독트린이나 도덕원칙을 구축하지 못했다. 케네디 행정부 시절 맥나마라의 지휘로 첨예화와 계량화를 통한 제한적 핵전쟁을 허용하는 독트린을 계발했지만, 전면적 전쟁으로 붉어질 가능성과 여러 제약조건으로 폐기됐다.

따라서 강대국들은 (달리말하면 UN 안전보장이사회 소속의 핵보유국들은) 열위의 무기체계를 가지고 있는 약소국이나 무장단체와의 충돌 때도 사용할 수 없었다. 베트남과 중동 아랍지역에서의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우크라이나에서 소련이, 그리고 알제리에서 프랑스는 인고(忍苦)의 장기전을 치렀고, 지금도 치르는 중이다.

오늘날까지 핵전략의 최우선 목표는 ‘억지’였다. 이 역학 속에는 핵의 위상을 활용해 우월한 협상력을 취하는 심리전략이 존재한다. 즉, 일국의 물질적 전력(가령 군사력, 경제력)만큼 무형의 요소(도발국의 심리상태와 도발로 인해 영향받는 자국의 능력)가 중요했다.

론 무형의 요소에 기댄다는 점에서 계산이 불가능하고, 증명할 수 없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외교를 통해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오해를 바로잡을 기회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뉴스 뒤 역사] 1962년 10월 쿠바…아마겟돈은 생각보다 가까이 와 있었다 (출처: 연합뉴스)

케네디 행정부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당시 미국에 주재한 소련대사 내외가 평소 흐루쇼프 내외와 함께 운동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기에, 소련 측에서는 어떠한 확전으로의 소요를 원치 않다는 점을 명백히 전해 들었다. 그 덕택에 다수의 위협에 대한 고조감에도 불구 위기를 비켜나갈 수 있었다.

한편, 해당 소련대사는 당시 미국 행정부 인사들의 눈으로는 소련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였고, 소련 참모부의 눈으로는 미국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였다. 과연 그는 지지자인가, 잠입자인가? 아니면 혁명가인가, 배반자인가? 그는 누구와 무엇을 위해 종을 울린 것인가? 냉전적 상황임에도, 이데올로기나 조직적 정체성은 유동적이고 불확실했으며, 이에 대한 고찰에서 우리는 첨단무기로 가득 찬 다가올 시대를 준비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제 42대 대통령, 빌 클린튼

한편, 냉전 이후 본격적인 컴퓨터 기술의 발전에 따라, 강대국을 포함해 많은 나라가 사이버 무기를 전력으로 채택해 각 국가의 억지기능을 보완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시작은 1990년대 美 빌 클린턴 행정부가 군에서만 활용되던 GPS를 의도적인 신호방해 없이 민간에도 서비스 제공 결정이었다. 사후적이지만, 이는 정부주도의 기술개발이 본격적으로 민간주도의 기술개발이 주도하는 변곡점이었다.

인터넷 대중화와 함께, 스마트폰 보급을 넘어, 이제는 AI의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 나아가 AI시대에는 가뜩이나 복잡한 현대 전략의 셈법이 인간의 의도를 넘어서는 수준의 발전이 진행형에 있다. 과연 핵무기 불사용이 영구적 원칙으로 남을 수 있을까? 절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신기술의 등장으로 핵무기를 둘러싼 딜레마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새롭게 핵전력을 보유한 국가로 편입한 경우(가령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의 전략적(동시에 외교적) 독트린도 다를 것이고, 민간인 살상을 대하는 국가의 태도도 점점 상이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인지편향(cognitive bias)을 가중시키는 알고리즘 체계는 이러한 딜레마를 더 가중시킬 것이다. 중국어 방의 역설(혹은 변형된 한국어 방의 역설)이 미처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수학능력(지능적이게 보이는 ‘행동’)과 지능을 무분별하게 동일하게 바라보는 상황은 이를 더 악화시킨다.

 다시 말해, AI의 행동이 곧 인간의 지성을 가진 것과 동일하다는 가정은 결국 자신(즉 이용자)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정 짓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인간의 지성(혹은 지능)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핵억제와 기술발전에 대한 주제를 확장시켜야만 한다. 이 질문이 곧 주미 소련대사의 행동에 대한 실마리와, 앞으로 다가올 AI에 대한 인지적 고찰과의 무수한 교차점들 중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좌: 엠마누엘 칸트, 우: 프리드리히 니체

한편, (다수가 은연중에 생각하는) 계몽주의 시대는 이를 상징하는 이성(reason)이라는 광명과 함께, 뉴턴의 이론물리학으로 무장해 칸트의 물자체에 더 가깝게 다가서며 과학계와 철학계를 뒤흔들었다는 ‘진보의 서사’는, 독일 낭만주의를 거친 프리드리히 니체의 망치와 아인슈타인을 필두로 한 양자물리학 연구와 상대성이론으로 ‘질곡의 서사’로 전환되고 있다.

실증주의의 횃불을 들고 이성을 전통에서 분리시켜, 사회구조를 역사의 방향성에 관한 ‘과학적’ 결론이라는 미명하에 재편하고 파괴됐다.

두 천재는 '시대'가 만들어냈다.. 출처:세계일보

비록 다가올 시대의 접근법의 향방을 현시점에서 명확히 제시할 수는 없다. 다만, 하이젠베르크와 닐스 보어가 수립한 양자역학으로부터 그 자취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태극' 닮은 양자 얽힘 현상 포착.. 출처:한국경제

 이들이 명명한 ‘불확정성 원리’처럼, 물리적 현실에 어떤 독립되고 고유한 형태가 존재하지 않고 관찰 과정에서 그 형태가 ‘만들어진다’는 점을 수용하는 것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화양연화> 中

동시에, 사라져 버린 세월은 한 무더기 벽처럼, 먼지 쌓인 유리벽과 같이 볼 수는 있어도 만질 수는 없다는 사실에서’도’ 그 자취의 향방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먼지 쌓인 벽을 깨뜨리고 사라진 세월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과, 과거의 모든 것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큰 흐름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자세가 곧 AI와 인간다움(나아가 억지[deterrence]에 대한 재정의)의 차이를 정의할 것이다.

요컨대, 개인으로 축약하자면, 즉각적인 정서적 공감을 통해 구축되는 배타주의와 이기주의를 버리고, 기이한 것에 관심을 가지는 호기심(好奇心)의 자세에서 변화가 촉발될 것이다. 설령 그 끝이 미어지는 슬픔일지라도, 썰물처럼 빠져나간 감각흔적 영원히 남겨 있을테니 말이다.


미흡한 장문의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생각할 거리와 상상할 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읽은 문헌>

- Anzhelika Solovyeva (2023) Moscow’s Perspective on Nuclear Deterrence and War, The RUSI Journal, 168:5, 20-33

- Johnson, James. “Deterrence in the Age of Artificial Intelligence & Autonomy: a Paradigm Shift in Nuclear Deterrence Theory and Practice?” Defense & security analysis 36.4 (2020): 422–448

- RUDOLF, P. (2021), U.S. Geopolitics and Nuclear Deterrence in the Era of Great Power Competitions. Political Science Quarterly, 136: 129-153.

- Wu Riqiang; Assessing China-U.S. Inadvertent Nuclear Escalation. International Security 2022; 46 (3): 128–162.

- 전재성, 김양규. 2023. 미중 간 전면 핵전쟁의 공포와 대타협의 가능성. https://www.eai.or.kr/new/ko/etc/search_view.asp?intSeq=22051&board=kor_spe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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