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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May 29. 2024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토양과, 꽃(花)과 버들(柳)

<마이코씨네 행복한 밥상>

지성사가에게 강한 영향을 받은 베리부잔(Barry Buzan)이 있는 코펜하겐 학파의 비판이론은 탈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안보의 근간이던 군사력에서 벗어나, 포괄적인 의미로서의 안보(이자 안전보장)이란 무엇 일지에 대한 인식의 재고를 통해 부상했다.

이제 상업사회(commercial society)와 공존하기 어려운 근대국가(modern state)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무엇이든 안전보장과 연결될 수 있는 ‘대(大)-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시대”가 개막했다. 안보문제화(securitization) 로 안보담론이 구축됨과 동시에, 화행(speech-act)이 수반하는 저의를 탐구함으로써, 기존의 전통적인 안보가 비추지 못한 점을 비-전통적인 안보를 통해 비춰보자는 취지로 코펜하겐 학파는 시작됐다.

증권화의 역점을 다룬 영화 <빅쇼트>

한편, 과연 “안보문제화”가 “Securitization”의 저의를 최대한 함축한 표현인지도 의문을 표하게 된다. 오히려, 경제학에서 번안하듯 “Securitization”을 “증권화(證券化)”로 표현하는 게 원문을 더 살릴 것이라 생각한다.

안보라 하면 곧잘 표상돼 “전통적이라 제시되는 군사적 안전보장”이란 사고의 틀에 어떻게 “외부” 변인이 영향을 주는지에 국한해서만 보수적으로 문제를 살펴볼 것이라는 화행(speech-act)이 담겨있는 것처럼 추론됨과 동시에, “Securitization”을 행하는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을 받아온 점을 비켜가기 위해 전통안보 유관자들에 국한시키려 하고 있다는 강한 인상을 피할 수가 없다.

물론 증권화 대상이 여전히 불특정 다수이기에 게임의 참가자와 행위자가 누구인가라는 한계점을 보완하기 위해 한정했다고 소명(疏明)할 수 있다. 하지만, 화행의 증권화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관료를 비롯한 행정 당국자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당대 사람들이 어떠한 언어게임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다시말해, 어떤 언어거울을 통해 대화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라는 미디어는 20세기의 (조금 더 보수적으로 말하자면 1945년 이후의) 화행탐구의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끝자락에 현현(顯現)한 영화는 전간기 즈음 본격화된 유럽인의 미국으로의 대탈주와 함께 영화산업의 본격화와 겹쳐, 1945년 이후 양극체제의 한 축을 담당한 미국의 부상 속 대중문화의 표상으로 자리 잡아 언어게임의 한 축으로 맞물리기 때문이다.

좌: 헨리 폰다, 우: 앤서니 퍼킨스

(대표적으로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가 오리아나 팔라치(Oriana Fallaci)와의 인터뷰에서 자기 스스로를 <반짝이는 별(Tin Star)>의 헨리 폰다(Henry Fonda)처럼 여긴다고 “직접” 언급한 부분이 해당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 착시. 패러다임의 전환..?

한편, 표상을 벗어나, 우리는 아직까지 공화주의 근대국가 패러다임과 상업사회 사이에서 고뇌한 계몽주의 시대의 패러다임 전환에서 완전한 전환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상기의 베리 부잔이 제시한 탈냉전 서사는 명징하게 직조해 낸 단단한 서사처럼 보이지만, 과연 이 서사가 적실성이 높은지에 대한 깊은 의구심이 든다.

행복의 세잎클로버, 행운의 네잎클로버 출처:네이버 블로그 포홈

복잡한 사회가 견디기 힘든 과거사를 다룰 때 직면해야만 하는 어려움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멀리 가지 않더라도, 비판이론의 부계 중 한 명인 로버트 콕스(Robert Cox)가 일찍이 <다수 문명에 대한 사유 외>에서 중세사회의 도래를 언급한 점이나, 창조적 파괴로 유명한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국가는 상업과 혁신을 인증발급기관으로 기능해야 한다고 원용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이 직조해 낸 서사는 마치 10년 동안 진행됐던 중국 문화대혁명과 1978년의 개혁개방의 관계를 중세 암흑시대를 르네상스 시대가 구원했다는 고색창연한 비유를 끌어와 서구에게 스스로가 중국의 구세주라는 인식을 부여한 것과 같다.

좌: J.G.A. 포칵, 우: 리처드 왓모어

다만, 더 긴 호흡에서, 지성사가 J.G.A. 포칵과 리처드 왓모어(Richard Whatmore)가 강조해 왔듯, 이들의 논의와 관련된 담론들은 1695년부터 본격화된 근대국가의 특징인 상비군의 제도화와 상업의 본격화에 따른 사치(luxury)의 등장, 그리고 투기세력(monied interest)으로 인한 국가부채의 흥쇠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한 데이비드 흄을 비롯한 18세기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일찍이 다뤄졌음을 지적하고 싶다.

물론 1688년 명예혁명이 왕의 옹립에 따른 영국 주권을 논하기 위해서는 중요하지만, 동시에 중요하지 않다. 1690년대 이후 다수의 학자들은 공화주의적 덕성(virtue)이 패러다임(이자 주류 담론)으로 존재하던 시대가, 상업사회(의 패러다임)와 조우해, 자신들의 시대가 마치 로마제국이 쇠락하는 것과 규칙적인 패턴을 띄고 있다는 사실에 고통받았기 때문이다.

좌: 데이비드 흄의 <영국사>, 우: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이러한 맥락에서 계몽사상가들 자의 철학적 사유를 역사 속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활동이 활발했다. 가령, 데이비드 흄은 <영국사>를,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집필하게 된다.)

유물론적으로는(그리고 사후적으로는) 분명 광명의 시대로 평가할 수 있다. ‘통제된(contained)’ 횃불에만 시야를 맞춘다면 황금시대(Golden Age)라 착각되기 쉽다. 한편, 횃불 밖은 전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고, 횃불을 들고 있던 사람들도 확신에 차 있지 않았다.

Henry Fuseli - The Shepherd's Dream

신대륙(오늘날 캐나다와 오세아니아)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와중에도, 이들은 언제나 자유국가에 망조가 들었다는 사실에 확신했고, 불안했으며, 신중하게 행동하고자 노력했음에도, 유럽대륙 소재 공화국들이 연이어 사라지는 사실에 개탄했다.


여기에 미국 독립전쟁에 사용되는 (휘그당 주도의) 막대한 국채 소모와 애국적 감정 고취 시도, (토리당과 자코바이트 주도의) 상비군과 휘그당 주도의 왕실&귀족의 당파적 의회운영에 대한 불만, 그리고 확장된 영토를 보유한 영국을 '제국'으로 규정할지 '연방'으로 정의할지에 대한 엘리트 층의 주권논쟁은 혼란을 가중시켰다.

스코틀랜드의 쪽박…영국 밑으로 출처: 서울경제

동시에, 당대 계몽주의자들은 오로지 근대국가와의 단절과 상업사회로의 완전한 패러다임의 편입 속에서만 ‘이 위기(crisis)’의 수렁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동시에 이러한 주장이 나오는 이유도 아직 패러다임 전환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라 조소했다.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사이에 유통되던 전단지(flyers)에도 비슷한 맥락의 내용들이 적시되어 있었다.)

공화주의의 언어와 상업사회의 언어는 시간이라는 층층이 쌓이는 토층처럼 쌓여 (불특정 다수의 추산이 한계라는 문제점 지적을 무색하게) 나름의 변용과 재조립의 과정을 1789년 프랑스혁명과 19세기를 거쳐 변용된다. 그리고 전간기의 언어 경합장을 넘어 냉전을 기점으로 전지구적 단위로 팽창됐다.

전간기의 시작, 1차 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 회의

한편, 베리부잔은 이러한 논의를 배제한 채 과학화에 치중한 나머지, (거칠게 표현하자면) 거대한 하나의 국제사회가 존재하고, 지역별 가치가 존재하며, 각 지역과의 가치가 증권화를 통해 혼합되고 겹쳐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그렇다면 과연 동아시아만의 어떤 언어게임과 패러다임이 존재해왔는가? 그러하다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글로컬라이제이션은 어떻게 변용되어 왔는가? 현시점에서 동아시아적 가치와 무수한 의미의 주권안보를 사수해야만 한다는 역설은 무엇을 의미하고 사수하기를 원용해온 것일까? 민족주의를 넘어, 과연 우린 어떤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장문의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생각할 거리와 상상할 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Fine.


<읽은 문헌>

- 민병원. 2006. “탈냉전시대의 안보개념 확대: 코펜하겐 학파, 안보문제화, 그리고 국제정치이론,” 『세계정치』 5: 13-62.

- Amir Lupovici, Toward a Securitization Theory of Deterrence,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 Volume 63, Issue 1, March 2019, Pages 177–186

- Claudia Aradau. 2018. “From securitization theory to critical approaches to (in)security,” European Journal of International Security 3-3: 300-305.

- Cote, Adam. “Agents Without Agency: Assessing the Role of the Audience in Securitization Theory.” Security dialogue 47.6 (2016): 541–558.

- McDonald, M. (2008). Securitization and the Construction of Security. European Journal of International Relations, 14(4), 563-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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