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의 아버지들이 판단을 유보했던 시민적 정부의 본질적 특성과 로크적 의미를 담은 독립선언문이라는 외피를 쓴 공화국이라는 본질은 2차대전 직전의 공교육 의무화와 학계의 분위기와 함께 달라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미국의 자유주의적 질서의 이미지도 여기서부터 구축된다. 형식은 본질을 잡아먹기 시작한다.
Immigration to the U.S. in the Late 1800s
이러한 기제에는 여러 요인이 있을 수 있다. 가령, 19세기 후반 유럽대륙에서 연이어 발생한 경제위기로 이민자 유입이 가속화됨과 동시에, 19세기말 내지 20세기 초 거대자본시장이 구축되기 시작하면서 소유를 통한 권리행사의 중요성이 본격화가 있을 수도 있다.
한편, 20세기 초까지 유입된 이민자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미국 초등 의무교육 과정에 로크의 삽화와 함께 로크는 미국적 가치의 상징으로 표상됐다. 실제로 2차대전 이후 미국 역사에서 로크식 정치와 자유 시장의 전통 외에는 전통이 없다는 학계의 저술들이 인기를 끈다.
미국 전체 인구 10% 이상이 투입된 전쟁의 종식과 함께, 미국 내부의 분위기는 계몽주의의 ‘과학적 원칙’으로 점철된 진보 서사의 계량주의와 로크주의가 일반대중에게 본격적으로 만연해진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미국의 전후 경제지표는 이러한 환상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2차대전의 종전의 순간 다가오던 1945년, 영국 총리 처칠이 미국 하원에서 “현 시점에서 미국은 세계의 첨두에 있다 (The United States stands at this time at the pinnacle of world power)"고 표한 것처럼, 소비주의 문화와 표준가족(nuclear family) 구성 형태, 그리고 자유주의 질서 전파를 통한 지구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미국의 대외정책이 이 시기에 구체화된다.
다만, 프런티어쉽(Frontiership)으로 덕성과 예절의 합일을 이뤄 온 미국의 덕성과 예절 사이의 긴장관계가 국내정치적으로 본격화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조화를 이뤘다. 영토적 확장을 통한 덕성 함양을 지향해 온 방식대로, 전후 미국은 개발이란 방식으로 질적 발전을 꾀한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미국은 1930년대의 뉴딜 및 페어딜 프로그램을 계승해 미국 내부의 인프라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남자 또한 마찬가지. 이제 군복은 수납장에 넣고 정장으로 갈아입을 시간
주택보급률 증대는 곧 덕성 함양이자 예절의 증대였다. 2차대전이라는 공익을 위한 개인의 참여는 곧 국가를 위한 희생으로 치환됐다. 희생은 경제적 보상으로 전환됐다. 인종 불문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징병제 하의 제대군인들은 사회 적응지원 법안 (G.I. Bill) 발의와 함께, 저리의 담보대출로 주택 보유가 가능해졌다.
토지는 계몽주의자들이 우려와 같이 정주(定住)의 개념에 방점을 두되, 환금성 자산처럼 여기고 있었지만, 전후의 미국인들에게 토지는 전자의 개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정주의 문제가 해소됐기에 교육의 기회가 열렸고, 주택 보유에 기반한 고등교육을 거친 중산층을 양성했다 [1].자유주의적 상업사회의 예절을 뒷받침할 공화주의적 덕성이 교육을 통해 창출될 여지가 마련됐다.
동시에,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미국에서는 이등 시민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There must be no second class citizens in this country)”며, 군대 내 흑인 인종차별 철폐와, 자연상태에서의 계약을 역설했다. 참전(參戰) 앞에 인종은 무의미했기에, 이들이 시민권을 원용하는 것은 당연했으며, 이는 흑인 참정권 운동의 토대가 된다.
백악관에서 베트남으로 떠난 사위의 음성 테이프를 듣는 린든 B. 존슨 대통령
하지만, 1960년대로 진입하면서 두 가치 간 조화는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금본위제 위에 설립된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는 미국 금 보유량보다 4배 더 많은 달러를 유통해 위태로워지고 있었고, 월남전 개입과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 프로그램 추진에 따른 재정악화로 경제악화는 가속화된다 [2].
점점 더 많은 부가 중산층의 손에 집중되면서 수직적 사회가 허물어지고,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68혁명을 필두로 이데올로기화된 대중이 생겨났다. 역설적으로 중산층에 부의 집중은 재능과 정력, 지성을 갖춘 사람들이 스스로 자유롭게 사회를 개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정부상태를 낳았다.
[1]
키신저 또한 이 제도의 혜택을 입는다. 1944년에 발의된 장병 재조정 법안(The Servicemen's Readjustment Act of 1944) 덕택에 하버드 대학교 입학금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Ferguson, 2015b, pp. 210).
[2]
놀랍게도 국가부채를 남용한 대 피트가 집권했던 영국과의 규칙성이 드러난다. 시장만능주의를 경계하던 록펠러 공화당(Liberal Republicans)의 가치는 재야파의 입장과 유사한 면모가 보인다. 이후 닉슨 행정부의 금태환 정지 선언과 함께, 변동환율제의 도입은 곧 서면보증의 시대(와 페트로달러 체제)로 돌입하게 됨을 반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