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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Jun 29. 2024

인간(人間) 헨리 A. 키신저에 대한 소고(小考)III

시민적 인문주의자

(2) 대영제국(British Empire) 속 저의(底意), 그리고 미국의 독립

식민지 팽창과 산업혁명의 대영제국으로 익숙한 18세기 영국의 이면에는 명예혁명 이후 집권한 18세기의 궁정파(이자 휘그당)의 상비군(Standing army) 창설과 금융혁명(Financial Revolution)을 주도해 근대국가의 기틀을 만들면서 발생한 재야파(이자 토리당, 舊휘그당 및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의 충격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다시말해, 궁정파가 창설한 후원제도 (patronage) 와, 영란은행 설립을 통한 국가부채(national debt)제도 적용이 있다.

덕성과 예절, 그리고 상경(上京)?

그 결과 토지 이익(landed interest)으로 함양할 수 있는 덕성은 야만이라 치부되는 풍조와, 이를 대체하기 시작한 신용(credit)과 예절(politeness 혹은 상(商)도덕)이란 개념이 덕성의 의미를 내포해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전쟁을 지속해야만 그 의미를 가지는 상비군을 운용하기 위해 휘그 궁정파는 국가부채를 늘리면서 식민지를 확보해 나간다.

좌: 데이비드 흄, 우: 아담 스미스

다만 18세기 후반부로 갈수록, 문필가(즉, 데이비드 흄, 아담 스미스를 비롯한 시민적 인문주의자)들은 부의 척도가 교환의 매개체가 되고, 상품과 서비스의 교환이 공익을 위한 서비스를 대신하는 상업사회에서, 공익을 위해 전쟁이나 정치에 참여하게 만드는 덕성이 존재할 여지가 사라졌기에 근심걱정했다.

인간의 탐욕과 경쟁의식을 통제할 해법으로 상업사회의 우수성을 시사했던 것과 달리, 이러한 사회 속 인간은 전문화의 과정 속에서 전쟁을 비롯한 공화주의적 미덕을 실천하고 구할 수 있던 활동을 타인에게 일임해 부패(corruption)가 가속화됐기 때문이다.

나아가, 상업사회를 촉발시킨 후원과 국가부채로 화폐적 이익(monied interest)을 영위하는 공공채권자 계층이 정치무대를 장악하게 된다. 이들은 변동이자율로 대출이자율을 결정했기에, 서면보증(paper guarantees)을 운용한 경제활동은 곧 타인의 재산 자체에 일종의 폭정을 행사하게 된다.

좌: 대(大) 피트(Pitt the Elder), 우: 소(小) 피트(Pitt the Younger)

여기서 피트 부자(父子)의 영국 총리 집권기 동안 국가부채 남용을 통한 식민지 팽창과 부패에 따라, 의회 기득권 궁정파에 대한 안티테제로 존재한 재야파 인물들의 주장이 미국으로 넘어가 1776년 미국독립혁명의 주축이 된다 [1].

<Happy Arcadia> - Konstantin Yegorovich Makovsky

식민지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선언되면서 영국(the state of GB)” 사이의 연결이 형식상끊기게 된다. 왕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가 곧 제국의 주권범위인 세계에서 미국(아메리카 식민지들)은 모국의 부패를 주장하면서 떨어져 나가, 변화에 맞서 덕성을 지키려는 고전적인 투쟁을 새로운 형식으로 구현한 자신들만의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2].

미국을 공화국으로 선포했음에도,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자연상태에서의 계약을 원용한 로크적 의미를 담아 성문화된다. 당시 미국인들은 로크가 주장한 이주의 자유라는 논리를 활용했고, 이후 정착민들은 왕국을 벗어나 자연적인 사회를 만들어 본국 정부와 자연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주장을 펼치게 된다.

한편, 후일 건국의 아버지들이라 불릴 이들이 로크의 주장에 감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들은 시민적 정부의 본질적 특성을 명확히 정의 내리지 못한 상태였으며, 그것을 명시할 의도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대 문필가들은 미국혁명과 함께 미국인들의 영토적이면서 상업적인 공화국 건설을 “한편으로” 낙관했다. 비이동적이고 환금성 낮은 토지를 매개해, 시민들이 공화주의적 덕성을 함양하고 공화국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예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동성 자산의 팽창에 따라 덕성은 곧 상업적 예절로 치환됐다. 이 갈등에서 상업은 일정 수준까지는 자유를 증진해 덕성을 키우지만, 임계치를 넘어서면 이를 파괴하는 반작용을 배태한다는 점에서 포르투나적인 모습을 띤다.

무엇보다 공화주의적 덕성을 지닌 집단(혹은 귀족)을 규정하기 위해 계급 내의 이합집산을 통해 정당성을 규명할 수 있는 영국과 달리, 영토적 확장을 통한 덕성함양을 지향해 온 미국의 정치구조 상에서는, 필연적인 공화주의 근대국가와 상업사회 간 부패의 갈등 속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다 [3].



          

[1]

대표적으로 흄의 부패를 경계하는 저술들은 미국이 강력한 후원 및 공공 신용 금융 시스템을 갖춘 상업 제국이어야 한다는 견해를 연방주의자들이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Pocock, 1985a).


[2]

당시 에드먼드 버크는 뉴욕 식민지 의회대리인이었으며, 식민지 주민들을 반란으로 몰아넣은 프레데릭 노스 경을 비판한다. 이는 마치 버크가 미국혁명에 대해 동조한 것처럼 보였고, 버크의 제자 프리드리히 겐츠는 버크가 미국혁명을 시민사회에 확립된 권리의 이름으로 이뤄진 것이지 전체 사회질서의 혁명적 개조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는 주장이 있다 (Gentz et al., 1977). 그러나 1776년 이전의 버크의 발언 대부분은 이익을 증진하고 화해를 통해 제국 내 식민지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그가 미국혁명을 지지했는지 반대했는지를 명확하게 판별할 수 없다.


[3]

나아가 유럽이 식민지 개척을 통해 해외로 제국을 확장했듯, 미국은 서부 개척과 노예제, 그리고 남북전쟁을 통해 ‘내부제국(이자 미합중국(美合衆國))’을 구축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거쳐 신생 공화국 미국은 비(非) 유럽인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한 담론과 대외정책을 구축하게 된다 (Westad, 2020, pp.5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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