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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Jul 06. 2024

인간(人間) 헨리 A. 키신저에 대한 소고(小考)V

시민적 인문주의자

(4)  시민적 인문주의자(Civic Humanist) 키신저

에드먼드 버크

사후적으로 되돌아보면, 키신저가 입각하기 이전까지의 시대적 맥락을 고려했을 때, 공직자로서 그의 결정 과정이 명약관화(明若觀火)라 할 수도 있다. 혹은 보수주의자 키신저가 버크와 달리 시대가 그를 불러 발탁시켰다고 할 수도 있다. 또는 시대가 사람을 만든다는 격언처럼, 시대는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도왔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여행자여 길이란 없다. 길은 걸어가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편, 본인의 미국 대전략과 냉전의 서결을 담아낸 <외교(Diplomacy)>의 말미에 언급한 스페인 속담처럼 [1], 처음부터 소련과 중국은 명백히 결별할 것이라 중국과 공조해야 한다고 원용하지 않았고 [2], 페트로달러체제도 국내정책의 관리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직접 고안하지도 않았다.

아가 50년대 중반 포린 어페어스 편집장을 노리다가 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스터디 그룹의 핵무기 분과 보고자로 일하며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외교전략을 비판한 <핵무기와 외교(Nuclear Weapons and Foreign Policy)>[3]를 저술한 계기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 넬슨에게 영입된다.

키신저는 다수가 겪은 2차대전 전후의 미국 서사 속에서 살짝 벗어난 인물이었다. 낙관론과 물질주의가 충만한 1940-50년대의 미국의 맥락 속에서 풍요의 혜택은 입었지만 세상이 돈으로만 절대 돌아가지 않는다고 믿었다. 나아가 데이터에 토대를 둔 사고과정에 대해 깊이 회의적이었다 [4].

좌: 키신저, 우: 프리츠 크래머

이러한 사고에 깊이 영향을 준 인물은 전쟁의 도덕적 정치적 이해관계를 역설한 프리츠 크래머(Fritz Kraemer) 덕분이었다. 군 복무 간 그와의 지적 교류는 키신저의 학부 및 대학원 논문 주제의 토대가 되었고, 회계학 전공인 키신저는 정치학도로 살기를 결심하게 된다.

키신저가 넬슨 록펠러를 회상하면서 제일 처음 언급하는 일화는 넬슨이 좌중들에게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오직 옳은 말만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였다.

키신저의 글은 크게 세 번의 과정을 거치면서 탐구 범위가 확장된다 [5]. 다만 그중에서도 초창기 글이 가장 중요하다. 역사와 철학에 대해 탐구했던 그의 결론을 1954년 넬슨을 만나 본격적으로 워싱턴가()를 쏘다니기면서 물리적으로 현출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키신저의 학부 졸업논문

키신저는 학부 졸업논문에서 개인의 내면과 외면의 이질성 속에서의 해우의 중요성과 그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외면의 제약은 시간 속에서 본인이 내린 결정에 의해 주물 되지만, 동시에 내심의 자유는 제약을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고자 시도(성공한 경우와 실패한 경우 모두 포함)한 내적 경험이 축적된 상태로, 자유를 경험한 사실은 곧 과거의 고통과 역사를 딛고 일어나게 해 준다고 원용한다. 다시말해, 내심과 외면은 오직 내적인 경험에 의해서만 조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6].

키신저의 박사 졸업논문

개인 단위의 분석은 박사 졸업논문에서 한 발 더 나간다. 19세기를 하나의 표본으로 삼아, 사고의 실험장으로서 박사 졸업논문(<회복된 세계>)에 적용된다. 여기에는 시간이라는 변수와, 모겐소의 <국가 간의 정치>에서 활용된 ‘정당성(legitimacy)’이 더해진다.

한편, 키신저는 모겐소의 정당성 개념을 차용했을 뿐, 권력중심(power-centric)의 역동성(moving)과 분포(thinking)에 집중한 모겐소의 <국가 간의 정치>와 달리, 키신저는 권력의 구조를 세팅하는 인물들에게 집중해 시대를 탐구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회복된 세계>를 거치면서 그는 자신의 보수주의적 입장을 확립한다. 내심의 역설을 시간과 이어 줄 수 있는 것은 보수주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버크와 유사한 입장을 지니게 된다 [7].

프랑스대혁명의 무질서와 혼돈에 대해 개탄했던 버크처럼, 키신저는 과거와의 단절을 원용하며 혁명주의적이고 미래주의적인 사고를 지향한 나치독일에 대한 적대심은 <회복된 세계> 도처에 흩뿌려져 있다. 키신저는 역사와 시간을 중요시했고,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 비극의 이야기로 파악하고 있었다 [8].

다만 어디까지나 키신저는 적용에 주안점을 뒀기에, 워싱턴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귀족에게 후원받던 영국 문필가(men of letters)들처럼, 튜티(tutee)와 튜터(tutor)의 관계로 넬슨의 특별보좌관으로써 그의 교육을 전담했다.

닉슨행정부의 구성원으로 들어가기 직전 넬슨에게 $50,000의 퇴직금을 받기까지, 키신저가 정기적인 후원[9]과 함께, 록펠러 숍(Rockefeller Shop)을 위해 실체적인 연구활동에 매진한다. 이 과정에서 록펠러 형제기금의 국제안보정책패널의 의장으로 임명돼 록펠러 패널 리포트(Rockefeller Panel Report)를 발간한다.

좌: 헨리 키신저, 우: 넬슨 록펠러

물론 교육이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그 또한 마찬가지로 록펠러로부터 간접적으로 영향받는다. 키신저는 록펠러 가문으로부터 온건한 가치와, 옳은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기탄없는 대화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

신실한 개신교(정확하게는 침례교)도였던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54살에 1년 시한부 인생을 통고받은 이후, 자선사업을 통해 ‘가문의 숭고한 정신’과 ‘소명의식(workmanship)’으로 사회에 환원해 왔다. 그의 유지(遺志)를 이은 록펠러 가문은 그 자체로 상도덕(politeness) 보다 덕성을 지닌 가문이었다 [10]. 

그리고 넬슨은 형제 중 존 데이비슨 록펠러의 가치관과 가장 흡사했다. 키신저가 윤택한 삶을 지향했는지, 혹은 살게 됐는지는 불명확하다. 다만 정치적인 목표를 실현하고 싶던 키신저는 전형적인 귀족적(이자 공화주의적) 사고방식을 지닌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계 남작(Barron)의 눈에 들었고, 키신저 또한 이러한 사고방식에 매료됐다.

한편, 공화주의적 덕성으로 통한 넬슨과 키신저라 할지라도, 공화당 내부 경선과 대선은 별개의 이야기다. 덕성을 실천하는 삶(victa activa)만으로 삶을 영위하기에 상업사회는 가까이 있다. 공화당은 당파로 분열(partisan schism)되고 있었다.

Nelson Rockefeller and Happy Rockefeller

1964년의 대선 경선 패배는 염문설을 터트린 배리 골드워터 캠프의 미디어 포퓰리즘 전략에 참패당한다. 1968년의 선거는 월가(Wall Street)와 시장을 규제하기를 원용한 넬슨보다 후원에 열려있는 닉슨이 로비에 더 매력적인 선지였기에 밀려났다.

후원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말해 적절한 부채를 통해 상업적 은총을 전파하지 못하는 것은) 월가와 이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넬슨은 1968년 선거 이후 “국가의 공익”을 위해서 (그리고 키신저의 “후원자(patron)”로서) 키신저를 닉슨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보낸다 [11].




[1]

 “여행자여 길이란 없다. 길은 걸어가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Kissinger, 2023a)


- Kissinger, Henry A. 2023a, 김성훈 역. 『외교』 서울: 김앤김북스



[2]

본인도 인정했듯, 케네디 행정부의 고문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만난 아데나워(Konrad Adenauer) 서독 총리가 이를 기민하게 포착했다고 술회한다 (Kissinger, 2023b, pp. 62).


- Kissinger, Henry A. 2023b. 서종민 역. 『헨리 키신저 리더십』 서울: 민음사



[3]

역설적이게도 이 책의 아이디어는 온전히 키신저 본인의 것이라 말하기 어렵다. 자신의 연구분야와 상이했기에, 2차대전 당시 정보처에서 함께 일한 크래머를 비롯한 이론 물리학자 오펜하이머(Julious R. Oppenheimer)의 의견을 취합한 후, <회복된 세계(World Restored)>를 일부 재인용해 집필하게 된다 (Isaacson, 1992).


- Isaacson, Walter. 1992. “Kissinger: A Biography” New York: Simon & Schuster



[4]

이러한 반감은 1965년 존슨 행정부의 월남전을 철수를 위한 무조건적 파리협정 제의에서 극에 달한다 (Kissinger, 1969c)


- Kissinger, Henry A. 1969c. “The Viet Nam Negotiations,” Foreign Policy, https://www.foreignaffairs.com/articles/asia/1969-01-01/viet-nam-negotiations



[5]

두 번째 과정은, 닉슨 행정부의 강령(manifesto)이 된 <미국 대외정책의 주요 현안들(Central Issues of American Foreign Policy)>과 함께 집필된 <국내구조와 대외정책 (Domestic Structure and Foreign Policy)>에서 국내정치와 국외정치 간의 모순을 조율할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세 번째 과정은 <외교>에서 자신의 철학을 국제정치 속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우드로 윌슨 사이의 고뇌로 확장시켜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국가 간 역학을 시간 속에서 조망한다 (Kissinger, 1966, pp. 503-505; Kissinger, 2023a, pp.9-48)


- Kissinger, Henry A. 1966. “Domestic Structure and Foreign Policy,” Daedalus, 95(2), http://www.jstor.org/stable/20026982

- Kissinger, Henry A. 2023a, 김성훈 역. 『외교』 서울: 김앤김북스



[6]

키신저는 콘라트 아데나워가 이러한 인물의 표본이라 생각했다. <외교>에서 건조하게 묘사한 여타 인물들과 달리, 아데나워에게만큼은 극진한 경의를 표한다 (Kissinger, 2023a, pp.542-528).


- Kissinger, Henry A. 2023a, 김성훈 역. 『외교』 서울: 김앤김북스



[7]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에 초점을 맞춘 <회복된 세계>지만, “나에게 자유라는 단어는 목표를 가리키는 것이었지, 한 번도 출발점을 의미한 적이 없었다. 출발점은 질서이며, 이것만이 자유를 만들 수 있다…. 특히 자유의 명분을 증진하기 위해서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날 때 전제정치는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 된다”는 메테르니히의 정치적 유서를 인용해 메테르니히와 (마찬가지로 전체주의는 혁명의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 예측한) 버크를 결합시키고 있다. “누군가의 체제”라는 명칭은 곧 보수주의 정치인의 패배를 혁명의 승리만큼이나 확실하게 기록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Kissinger, 2014 pp. 375-385).


- Kissinger, Henry A. 2014, 박용민 역. 『회복된 세계』 서울: 북앤피플



[8]

메테르니히도 이러한 맥락에서 키신저의 비판을 비켜갈 수 없었다. 그는 메테르니히의 한계점으로 “물리학자가 일순간만이라도 전자를 고정시키려고 자신의 모든 정력을 쏟아붓는 것과도 흡사하다”며 일순간의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키고자 한 게 맹점이라 원용한다 (Kissinger, 2014, pp. 394-396).


- Kissinger, Henry A. 2014, 박용민 역. 『회복된 세계』 서울: 북앤피플



[9]

1958년 기준으로 키신저가 넬슨을 위해 일하면서 받은 보수는 $3,000달러 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그가 하버드에서 일하면서 받은 금액을 살짝 웃돈 금액이었다. 하지만, 키신저가 받은 보수는 $3,000달러 그 이상이었다. 키신저는 록펠러 가문 소재의 호화저택(Pocantico Hills)을 비롯해, 맨해튼 소재 고급 아파트에 자유롭게 접근했다. 여기에 기념일마다 예술품을 넬슨이 보낸 선물로 받았다 (Ferguson, 2015b pp.394-395)


- Ferguson, Niall. 2015b. “Kissinger 1924-1968: The Idealist” New York: Penguin Press



[10]

록펠러가 주류였던 당시의 공화당은 중도우파 성향으로 시장만능주의를 경계하고, 정부의 확장적 개입을 통한 의료, 고등교육, 환경보호와 같은 안전보장제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넬슨이 사망한 1979년을 기점으로 (그리고 1970년대 신자유주의를 내건 배리 골드워터와 로널드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신보수주의자들과 계량주의자들의 본격적인 등장으로) 록펠러 공화당은 그 세(勢)를 잃게 된다 (Libby, 2014).


- Libby, Ronald T. 2014. “Purging the Republican Party,” Lanham: Lexinton Books



[11]

아이러니하게도 넬슨 또한 이러한 분열에 일조했다. 넬슨에 대한 안티테제로 1960년대 중반즈음부터 자유시장주의자였던 배리 골드워터를 비롯한 군소 파벌들이 산발하기 때문이다. 한편, 1959년부터 뉴욕 주지사로 재직하던 넬슨은 공화당 내 실질적(de facto) 당대표였다. 1960년 대선을 준비하던 닉슨도 넬슨의 도움을 받기 위해 당선 후 군사와 외교지침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선거지원을 약속(Treaty of Fifth Avenue) 받고, 닉슨의 1968년 당선 때도 유효했다. (Smith, 2014; Reinhard, 2014).


- Smith, Richard Norton. 2014. “On His Own Terms: A Life of Nelson Rockefeller,” New York: Penguin Random House

- Reinhard, David W. 2014. "The Republican Right, " Kentucky: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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