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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Jul 16. 2024

인간(人間) 헨리 A. 키신저에 대한 소고(小考)VII

시민적 인문주의자

(2) 닉슨과 함께한 위기들과의 해우: 미중 코뮤니케

다수의 저술에서 미·중 간 개혁개방의 서사를 경제적 요인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문화대혁명을 시작으로,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직후, 덩샤오핑이 등장해 1978년 개혁개방을 천명하면서 연평균 9%의 경제성장을 달성한 중국 경제성장의 기적을 지적한다.

하지만 이렇게 직조된 서사는 마치 문화대혁명과 개혁개방의 관계를 중세 암흑시대를 르네상스 시대가 구원했다는 고색창연한 비유를 끌어와 서구에 스스로가 중국의 구세주라는 인식을 부여한 것과 같다.

공식회담, 비밀회담

실상은 경제적 변인보다 UN이라는 전지구적 정치체제에 편입되고자 한 정치적인 이유가 더 컸고 (생전에 키신저도 중국과의 개방을 회고할 때 경제적 이해타산에 역치를 두고 피력한 적이 없다), 미국이 중국의 문을 열었다는 인식과 달리, 중국이 먼저 접근했다 [1]. 키신저와 닉슨이 원한 것만큼, 중국도 국제관계적으로 원했을 뿐이다.

1970년 1월 미·중 대사 간 접촉으로 중국-대만 문제를 논할 의지확인을 거쳐, 중국은 폴란드를 통해 미국이 대만문제를 ‘두 개의 중국’이나 ‘하나의 중국, 하나의 대만’ 절차의 맥락에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대통령 특사를 북경에 들일 수 있다는 조건을 2월에 내걸었다.

나아가 월남전을 중국과 미국 사이의 문제로 보지 않고, 철수하는 미국에 확전 하지 않겠다는 의사도 전달한다. 이는 키신저 측에서 중국에 기대한 제의보다 파격적이었다 [2]. 공식적으로 미국은 1971 4월에 저우언라이의 방중 제의를 수락한다. 다만 미국의 사전작업은 그전에 이뤄졌다. 중국의 UN 가입도 그 과정의 일환이었다.

키신저는 UN을 하나의 거대한 공화정체로 여겼다. 안전보장이사회라는 경찰관들(달리 말하면 상원)이 만장일치제로 총회(달리 말하면 하원)의 사안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미국을 대영’제국’의 주권을 나눠 받았다고 여겼다 (이후 키신저는 73년을 거치며 대서양관계의 부활과 그 중요성을 본격적으로 강조한다). 상임이사국 간 의결로 처리하기에는 대만이 직접 반대할 것이기에 가능성이 낮았다. 다만 안보리 결의는 “절차상” 총회에서 뒤집을 수 있다. 그렇기에 중국이 UN의 절차를 따라 총회를 거쳐 “적법하게” 들어오는 방식을 취하기로 정한다.

키신저는 중국과 가깝던 알바니아 주도하에 중국을 받아들이는 결의안을 상정하는 동시에, 캐나다(당시 대영제국의 캐나다 자치령)가 의제를 주도하도록 종용한다. 이는 영연방 국가들의 표결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이후, 대만을 추방하자는 알바니아 결의안이 발의되기 4일 전, 미국이 UN 총회에서 대만을 지지해 노력했다는 정당성을 취한 채(중국을 반대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두 개의 중국 원칙이 UN에 상정되지는 않도록 유도했다 [3].

미국의 만류에도 불구, 중국이 외교적 승리를 취할 수 있는 구색을 갖춰 편입될 수 있도록 마련했다. 게다가 중국은 아직 UN 미가입국이기에, 근대국가들의 모임으로 그 의미를 확장해 가는 국가들 간의 연합(United Nationa)의 정통적인 해결책이던 2국가해법 준칙을 우회할 수 있었고, 가입 이후에 대만의 UN 가입일로 소급시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존중하면 충분했다 [4].

좌: 대만의 탈퇴선언 직후, 우: 대만의 UN 탈퇴 선언 후 퇴장하는 모습

1971년 10월 25일 중국은 UN을 자진 탈퇴한 대만의 자리를 대체했다. 동의한 국가에는 영국, 프랑스, 소련이 있었고,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지만, 영국은 모든 영연방 주권국가가 주권을 행사한 후, 이를 인가하는 방식으로 주권을 행사한다.

IMF를 비롯한 경제기구들도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의 UN 가입을 국제금융기관이 UN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UN 가족의 구성원이므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UN 국제원칙에 설정된다며 환영한다 [5]. 비로소 미국과 영국 사이의 대서양관계의 주권에 관한 담론이 완성돼 전지구적으로 확장됐다.


          

[1]

물론 키신저와 닉슨 둘 다 중국과의 화해 가능성을 염원했고, 이전 행정부들도 그러했다. 닉슨이 취임 직후 키신저에게 보낸 첫 의견서(memorandum)는 중국과의 화해 가능성 모색이었다. 당시 중국과의 공식 접촉 채널은 폴란드였고, 미국은 1954년 이래로 중국과의 관계 개선 시도만 100번이 넘었다. 이전과 다른 점은 닉슨은 키신저에게 비밀리에 중국에 접근하도록 시켰다 (Kissinger, 2023c; Nixon, 1969; Sneider, 1969).


- Kissinger, Henry A. 2023c. “Henry Kissinger at 100: Former Secretary of State on China

Relations, Vladimir Putin, US Politics,”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TY8YBv306sY&t,

- Nixon, Richard M. 1969. “Memorandum From President Nixon to his Assistant for

National Security Affairs (Kissinger),” Office of the Historians,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69-76v17/d3,

- Sneider, Richard L. 1969. “Memorandum From Richard L. Sneider of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Staff to the President’s Assistant for National Security Affairs (Kissinger),” Office

of the Historians,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69-76v17/d5



[2]

중국 측에서 미국이 제의한 대사급 회담보다 특사를 제의한 이유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따른 국내정치적 혼란 때문이기도 하다. 문화대혁명으로 린뱌오에게 밀려 정치적 위기를 맞이했다가 전화위복 한 주은래에게 미국과의 활로모색은 자신의 정치생명의 연장선과도 같았다. 내부의 불완정성으로 인한 위기는 외부와의 연계로 이어질 수 있었다. 미국과의 개혁개방에도 중국이 나름의 자율성을 가질 수 있던 점은 모택동이 역설적이게도 내부의 분란에 대비해 군사적 자원을 비축해 뒀던 점과 균일한 노동자의 창출로 인해 가능했다 (Kraus, 2024).


- Kraus, Richard C. 강진아 역. 『문화대혁명』 파주: 교유서가



[3]

좌: 조지 부시, 중: 리처드 닉슨, 우: 요스트 전임 UN 미국대사

당시 주 UN 대사는 정치신인이던 조지 H. W. 부시였다. 그는 닉슨의 데탕트 정책을 적극 지지해 UN 미국대사(내각 공식 구성원이자 국가안보회의에 상시 참석하는 장관직에 준함)로 임명된다. 이후, 부시는 1974-75년 중국 주재 연락사무소장(비공식 대사)을 지내게 된다 (Richard Nixon Foundation, 2014).


- Richard Nixon Foundation 2014. “Nixon: Congressman Bush to be U.S. Representative to United Nations,” Richard Nixon Foundation, https://www.nixonfoundation.org/2014/12/nixon-

congressman-bush-u-s-representative-united-nations/



[4]

https://www.washingtonpost.com/history/2023/05/13/harry-truman-israel-antisemitic/

좌: 해리 트루먼, 중: 아바 에반 주미 이스라엘 대사, 우: 벤구리온 이스라엘 총리

당연히 정통적인 해결책의 시행가능성은 최소한 1950년대부터 오랜 시간 회의적이었다. 이스라엘 건국과 팔레스타인의 분할의 경우, 미국에서 이스라엘 건국은 중동에 유럽적 국가를 이식하는, 중동 지역에 문명과 민주주의를 수출하는 방식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소련의 스탈린에게도 이스라엘 건국은 전술적 이점이 있었다. 아랍 국가는 주로 서방 제국주의의 지지를 받는 보수적 봉건 정권인 경우가 많았다. 시오니즘 국가가 창설되어 아랍 국가들 사이에 자리 잡는다면, 이는 진정한 아랍 민족주의의 성장을 촉진할 수 있을 터였다. 또, 만약 이스라엘이 이웃 아랍 국가의 위협을 받는다면, 좌익 시오니스트들이 소련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Jewish Emigration from Europe to Israel (1945-1970)

대다수 전후 유럽 지도자에게도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처음이자 가장 큰 보상을 의미했다. 이스라엘 건국은 히틀러의 절멸 정책으로부터 유대인을 구하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았음을 비판해 온 유대인을 달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요컨대, 팔레스타인을 분할하는 국제연합의 계획은 어려운 문제를 미국과 소련의 손이 아니라 다른 기관의 힘을 빌려 해결하는 것이었고, 이는 미국과 소련 모두에 각자의 냉전적 이익을 보장했다. 한편,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1948년 2월에 "상황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영원히 풀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듯 이와 같은 해결책이 과연 가능한지를 두고 의문이 존재했지만 말이다 (Westad, 2020).


- Westad, Odd Arne. 2020. 옥창준, 오석주, 김동욱, 강유지 역. 『냉전의 지구사,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 서울: 에코리브르



[5]

당시 세계은행 총재였던 맥나마라도 국제부흥개발은행 (IBRD)과 대만의 관계는 불안했기에 언제든 대만을 탈퇴시킬 준비가 됐었다고도 평했다 (Mcnamara and Blight, 2024).


- Mcnamara, Robert S, and Blight, James G. 2024. “Robert S. McNamara papers,” Library of

Congress, https://www.loc.gov/item/mm96083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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