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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Jun 27. 2024

인간(人間) 헨리 A. 키신저에 대한 소고(小考) II

시민적 인문주의자

II. Tragedy of Story: 낙관론과 거리가 먼 이단아

독일 출신 키신저가 정치학자로서 명시적인 교류가 존재했던 독일 출신 모겐소나 독일계 넬슨 록펠러(이하 넬슨)와 달리, 포콕과 역사학자로서의 밀접한 지적 교류가 있었는지 여부를 판가름하기에는 시간과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1]. 나아가 독일인 이민자가 포콕이 발견한 영국적(이자 미국적) 맥락에 부합할지 또한 희미하다고 할 수도 있다.

좌 : JGA 포콕, 우: 헨리 키신저

다만 키신저와 포콕은 유사한 문제의식을 소싯적부터 공유했다. 역사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철학을 톺아보고자 노력했으며, 위기(crisis)에 관심이 있었고, 단선적인 역사 전개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며 보편성과 특수성에 사이에서 고민했다.

전세계적으로 발생했던 68운동

키신저의 눈에 “위기”는 60년대 말의 격렬했던 학생운동(통칭 68”혁명”)이었고, 프라하의 봄을 보며 양차대전의 그것보다 본질적으로 훨씬 더 혁명적이라 여겼다. 유사한 정치구조와 문화를 지닌 NATO 소속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불안하다고 생각했다. 60년대의 시민운동은 이전과는 다른 혁명적 변화의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소 초강대국 시대의 종말과 대서양 밖의 지역 안보동맹의 와해와 함께, 구조적 문제가 발생했다고 봤다. 그렇다고 키신저에게는 과거로 회귀도 좋은 접근법이 아니었는데, 마셜플랜 전성기일 적 군사력을 통한 미국의 리더십으로 회귀하겠다는 건 대서양관계를 명백하게 단절하는(sunder) 것과 동일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번 붕괴한 질서는 혼돈의 경험을 통해서만 회복할 수 있다는 점이 보수주의의 모순이다. 그에게는 안정시킬 질서가 필요해 보였고, 한 때 대영제국의 주권을 나눠 받은 미국이 영국과 다시 이어질 필요가 있었다.

William and Mary Charter Day, 2001

한편, 2001년 2월에 키신저가 건국의 아버지들 중 4명이 졸업한 학교이자, 명예혁명의 주역 윌리엄 대공과 그의 부인 메리의 윤허로 설립된 윌리엄 & 메리 대학교(College of William and Mary)의 9대 총장으로 임명된 직후(9.11 테러 발발하기 전), 첫 행사로 참석한 개교기념일(Charter Day) 담화 내용을 보면 그가 미국과 영국의 역사적 맥락에 포섭돼 사고 및 행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키신저의 북대서양과 서반구의 민주주의와 개방된 시장과 원칙을 언급하며 질서의 연결고리의 영속성 강조를, 각각 영국의 제국과 주권 그리고 상업사회와 과거와 헌신으로 치환해서 듣게 되면 그의 언어는 매우 공화주의적이면서 버크적이라는 점을 톺아볼 수 있다 [2].

좌: 도널드 럼스펠드, 우: 넬슨 록펠러

미국이 오늘날의 모습이 되기까지의 변화와 보존과정이라는 의미로서의 “과거”가 무엇인지, 특정 사회가 유지되려면 변경할 수 없는 조건이 있다는 맥락으로 어떻게 “헌신”해야 하는지는 키신저 본인에게도 버크에게도 (심지어 넬슨에게도) 매우 중대한 사안이었다.

Kissinger interrupts a meeting between President Ford and his advisers: Dick Cheney, Donald Rumsfeld

하물며 그가 에드먼드 버크 상(賞) (Edmund Burke Award for Service to Culture and Society)을 수상하면서, 본인을 신보수주의자 (neoconservative) 들을 계량주의에 매몰된 혁명주의자(universalism)라 선을 긋는 모습은 그 자체로 이전 사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변화시키는 것을 공공연한 목표로 삼는 혁명가들과 거리 두는 보수주의자적(이자 공화주의자적) 면모를 보인다 [3].



(1)  미국주도 자유주의 질서 속 저의(底意)

키신저가 1960년대 말의 “위기”를 대처하고자 시도한 시민적 인문주의자라 추론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숨 쉬듯 당연한 (대서양을 포함한)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반추(反芻)할 필요가 있다.

키신저를 대표하는 “미국에 영원한 우군도 적군도 없다. 오직 국익만 존재한다”는 문장의 이면에는 미국 내부의 공화주의와 자유주의 가치 사이의 간극을 좁힌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거니와, 당대의 주류 분위기와 달랐던 키신저는 입각 후 18세기 미국이 염두해 온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병존”을 실현하고자 대외정책을 구사해 안보협정을 비롯한 실천적인 결과물들이 배태되기 때문이다 [4].

요컨대, 자유주의 질서의 창립 시기를 1991( 1945년) 보다 이전으로 되돌려야 한다. 한국에 자유주의 질서의 창발(創發)과 본격화는 곧 냉전 종식의 서사와, 세계화라는 이름의 급속한 신자유주의 이식과정을 거쳐 자유주의 질서가 어느새 다가왔기에, 이 작업은 중요하다.

Members of the League of Nations convene in Geneva, Switzerland in 1920.

물론 미국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대영제국의 그것과 별개일 수도 있다. 가까운 과거로는 전간기(Interwar period) 국제주의(Internationalism) 성향의 지성인들의 가치있는 질서에 대한 숙고가 2차대전을 거쳐 전지구로 팽창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혹은 평화적 이양의 가능성을 시사한 벨 에포크(Belle Époque) 속 대영제국의 문화적 유사성과 패권의지, 그리고 은본위제(silver standard)를 비롯한 경제적 요인을 짚어내 영국과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질서의 차별성을 제시할 수도 있다.

다만, 영국과 미국이 문화(정치문법)를 공유했다거나, 경제적 구조의 차이로 인한 평화적 세력전이로 거칠게 역설하기보다는, 19세기의 영국과 미국의 정치문법이 계몽주의 지성인들에게 빚지고 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조금 더 적확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질서의 기원은 미국이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던 18세기에 근거해 있다. 

출처: kurzgesagt

동시에 그 질서의 이면에는 모국(母國)인 영국에서 발발한 명예혁명에 대한 당위성과, 직후에 등장한 (당시 기준 전대미문이었던) 상업사회의 출현으로 인한 패러다임 변화(Paradigm Shift)에 있다. 미국주도의 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인지의 시작은 영국의 질서(이자 국가 내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국제정치)에서 시작돼야만 한다.




[1]

입지전적의 두 인물 모두 소천(召天)한 지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았고, 각료생활 때부터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던 키신저와 달리, 포콕에 대한 인물탐구 및 평가는 올해 초부터 본격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2]

실제로 하버드 대학교 전임교수로 부임했을 적, 키신저의 인기 있던 정부학(Department of Government) 학부 수업인 <국제정치의 원칙들(Principles of International Politics)> 강의계획서(syllabus)에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The Prince)>과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이 1960년대까지 꾸준히 수록됐다 (Ferguson, 2015b pp. 405).


Ferguson, Niall. 2015b. “Kissinger 1924-1968: The Idealist” New York: Penguin Press


[3]

키신저는 또한 신보수주의자들과 달리, 중국과의 개혁개방 조치를 비롯한 대서양연합 외의 지역에 경제적 교류를 통한 민주주의 정착의 복음전파(evangelical)에 천착하지 않았다. 이념보다 지정학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닉슨 또한 마찬가지였다 (Kissinger, 1969a, pp. 40-41; Gaddis, 2005, pp. 297).


- Kissinger, Henry A. 1969a. “Central Issues of American Foreign Policy,” Office of the Historian,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69-76v01/d4

- Gaddis, John Lewis. 2005. “Strategies of Containmen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4]

자신의 사고와 경험을 망라한 1995년작 <외교>에서, 본인의 국익중심(Raison d'etat) 외교와, 고뇌하는 미국 대전략의 기원을 종교적이면서 세속적인 리슐리외와 영국 명예혁명에서 시작하고 있기에, 이 과정은 필수적이다 (Kissinger, 2023a, pp. 49-72).


- Kissinger, Henry A. 2023a, 김성훈 역. 『외교』 서울: 김앤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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