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를 살다 작년(2023년) 11월에 타계한 키신저는 오늘날 다극체제의 세계질서를 구축한 메테르니히라 불려지기도 하면서, 동시에 오늘날 세계의 악의 원흉이라 불리기도 하는 양가적인 인물입니다.
다만 그를 다룬 전기(傳記)에서도 그의 순진성(혹은 간사함)에 초점을 맞춰 글이 기술되는 경향이 있을 뿐, 그가 어떠한 맥락에서 외교를 구사했는지는 잘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조악하지만 제 글을 통해 모자이크 같은 그의 모습을 조금 더 탐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희구합니다.
(추신. 여타 글들보다 많은 각주가 달릴 듯합니다. 각주는 각 글의 최하단에 달릴 예정이며, 출처를 함께 표기할 예정입니다. 읽으실 때 유의해주시길 바랍니다.)
I. 들어가며
“Ding-doing! The Witch is Dead!” 2013년 마거릿 대처(이하 대처)가 타계한 직후, BBC 음반 차트에서 2위와 스코틀랜드 음악차트 1위를 석권한 이 노래는 2023년 11월 헨리 키신저(이하 키신저)가 작고하면서 다시 한번 인터넷을 달궜다. 실로 키신저는 이립(而立)을 갓 넘긴 나이부터 (그리고 상수(上壽)까지) 왕성한 집필활동과 안보 컨설팅으로 정·재계에 영향을 미친다. 마법사처럼(혹은 협잡꾼처럼) 경이로운 외교술을 구사했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수용하고 비극과 역설에 대한 인지에서부터 고전적 현실주의(Classical Realism)는 배태된다. 비극을 피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비극적으로 사고해야만 한다. 키신저 인생의 서막에는 아이러니와 비극이 공존했다.
1938년 미국으로 넘어온 이후로 언제나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타자화 시켜왔지만, 동시에, 마치 로마공화정처럼 2차세계대전(이하 2차대전)에 참전해 미국 시민권을 얻어, 스스로를 미국인이 된 것만 같은 “미국화 과정(Americanization Process)”도 겪는다.이후 독일 태생 유대인인 그의 외교는 역설적이게도 원조와 정치·경제 압박과 같은 전통적 방법으로 미국의 국익을 위해 행동하는 정치현실주의를 지향했다.
한편, 입각(入閣)까지의 그의 길은 순탄치 못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학계에서는 학자가 아니라 질타받고, 정계에서는 학자라는 이유로 정치인답지 않은 성품과 행동에 힐난받는다.국가안보보좌관 시절부터 거쳐 간 유수의 참모들이 소회하듯, 키신저는 언제나 백악관 속에서 홀로 동떨어져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자, 신화 속 염소지기 판(Pan)처럼, 옳고 그름이라는 이중성을 눌러 담아 말로 모든 것(pan)을 표현하고, 역설을 순환시켰다. 2차대전의 끝과 냉전의 신화 서사 속에서 그는 염소지기 판이자, 사티로스(Satyr)다.
키신저는 자신의 불완전성을 수용했지만, 그 아이러니성에 잡아먹히지는 않았다. 내면의 아이러니와 대화할 때는 윌리엄 얀델 엘리엇 교수가 있었고, 현출할 때는 한스 모겐소가 있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또한 이들에 헌정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았다.
좌: 한스 모겐소, 우: 헨리 키신저
아이러니하게도 사제지간이자 교우지간이던 모겐소와는 1966년에 린든.B.존슨행정부의 월남전 여부로 격렬한 찬반 논쟁을 펼치게 된다. 전쟁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피력한 모겐소와 달리, 키신저는 전쟁에 더 적극적이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하물며 키신저는 존슨행정부의 반전(反戰)에 대한 편집증적인 반응을 염려해, 사상자가 증대하는 와중에도 존슨 대통령이 “고독하고 고된 결단” 내리고 있음에 애도를 표했다[1].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건들지 말아야 한다는 “학자” 모겐소와는 달리 키신저는 다른 접근을 취한다. “정치인에 준하는” 그는 이제 스스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하나씩 풀어내고자 시도한다.
공화주의적 덕성(Virtue)과 포르투나(Fortuna 혹은 운명)의 문법은 키신저에게 언제나 함께 있었고, 실천하는 삶(vita activa)을 실현하고자 노력한 그는 시민적 인문주의자(civic humanist)였다. 실제로 공직에서의 키신저는 미국의 운명(Fortuna)이라는 공화주의적 사고방식을 유념해 왔다.
나아가 그는 본인의 유작 <리더십>에서 유럽지역에서 교회와 왕위 간 정당성을 찾던 체제를 세속국가의 주권 기반 체제로 바꿔 놓은 30년전쟁에 이어, 1914년 1차세계대전 발발부터 1945년 2차대전의 종식까지의 두 번째 30년전쟁이라는 과정을 (본인을 포함한) 각지의 리더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해쳐나왔다고 술회했다. 그런 의미에서 키신저는 근대국가와 상업국가의 패러다임 전환에서 고뇌한 시민 인문주의자적 요소(특히 잉글랜드의 역사는 토지에 기초한 보존가와 상업에 기초한 혁신가들의 끊임없는 대화라 해석한 에드먼드 버크(이하 버크)의 면모)를 십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키신저는 근대국가와 상업국가의 패러다임 전환에서 고뇌한 시민 인문주의자적 요소(특히 잉글랜드의 역사는 토지에 기초한 보존가와 상업에 기초한 혁신가들의 끊임없는 대화라 해석한 에드먼드 버크(이하 버크)의 면모)를 십분 가지고 있다.
본 연구는 입각하기 이전과 닉슨행정부 기간의 키신저를 버크적이면서 공화주의자적 인물로 조명하고, 인물에만 초점을 맞추는 다수의 전기(傳記)와 달리, 이들이 놓치는 키신저의 외교를 대서양연합(Atlantic Community)의 긴 호흡에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록펠러 가문과의 음모론이라던가, 빌더버그 회의(Bilderberg Meetings) 참여와 관련된 가담항설(街談巷說)은 가급적 배제한 채, 학자와 공직자로서 그의 행적을 추적한다. 또한, 지면상의 한계로, 금태환 정지와 중국 개혁개방에만 초점을 맞춘다.
‘고전적 인물’ 자체가 되어버린 그에 대한 탐구는 한국이 변화하는 질서를 어떻게 해쳐 나갈지에 대한 나침반 제공해 준다. 공(功)과 과(過)를 차치하고, 냉전 속에서 오늘날의 다극 체제의 밑그림을 구상한 예술사(史)가이자, 자유주의 국제 상업질서와, 지정학에 기반의 해군력 배치를 통한 미국 군사 대전략의 얼개를 짠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편, ‘인간 키신저’의 사고과정이 구축된 과정을 오롯이 복원하기에 그는 너무 많은 베일에 싸여 있다. 그의 통찰과 구사한 문법이 가장 필요한 순간이지만, 이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그가 만들어낸 세계의 자취(locus)가 많이 허물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행할 수 있을 것이다.
[1]
모겐소는 키신저의 이러한 발언에 대해 이해했다. 키신저가 존슨 행정부의 정책에 대해 호의적인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면, 그가 넬슨 록펠러와 함께 1968년 파리에서 열린 베트남 평화 협정을 미국 대표로서 교섭하러 가지도 못했을 것이고,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행정부의 관료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Morgenthau, 1969).
Morgenthau, Hans J. 1969. “Kissinger on War: Hans J. Morgenthau, reply by Clayton Fritchey,” The New York Review, https://www.nybooks.com/articles/1969/10/23/kissinger-on-w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