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 오류의 유혹을 극복하기 위한 인류학적 마인드셋
우리는 곧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말하곤 한다. 이것은 지금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문화적 가치다. 십수 년 전만 하더라도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한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대학은 나와야 했고, 직장에서는 양복을 입었고, 나이가 차면 결혼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틀에서 벗어났을 때 불안함을 느꼈다. 이것이 그 시대의 문화적 가치 체계였다.
만약 이런 것들이 완전히 반대된 나라에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들은 삶에 있어서 필수가 아니라는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대학을 안 나와도, 직장에서 양복을 안 입어도, 결혼을 하지 않아도 완벽하게 정상인 삶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진짜로 중요한 것들은 무엇일까 궁금해하곤 했다. 그러한 것들을 탐구하기에 인류학은 내게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상대방과 나, 두 사람의 사고방식을 다르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가였다.
(1) 저 사람은 왜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가? 나는 왜 저 사람과 다르게 생각하는가?
(2) 정상인 것은 무엇이고, 정상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3)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이고, 가치가 없는 것은 무엇인가?
재미있게도 이때 배운 문화인류학적 마인드는 사용자 경험을 설계하는 데에도 유효했다. 특히 디자인 씽킹을 머릿속에 내재화하는 데, 인류학적 사고방식은 효과 좋은 마중물이었다. 배움이 깊지 않을 때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야 인류학이 경험 디자인 프로세스에 남긴 유산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인지심리학과 문화인류학이라는 유서 깊은 두 줄기의 굵직한 인문학적 강물과, 컴퓨터 과학이라는 공학 영역의 만남이 HCI(Human-Computer Interaction)라는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HCI는 기본적으로 다학제적 연구*의 형식을 취한다. 그리고 이렇게 다학제적으로 잘 연구된 서비스를 사용자에게 실재하는 좋은 경험으로 제공하기 위해 산업디자인과 사용자 경험 영역이 활용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탐구하는 서비스 경험 설계의 인문학적 기둥이다.
다학제적 연구*
학제(學際)란, 말 그대로 '학문과 학문 사이'를 뜻한다. 이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를 '국제'(國際)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근대 학문이 세분화되고 전문화하면서 크게 발전하게 되었지만, 그 결과로 전문 영역이 지나치게 좁아지게 되었다.(...)
학제적이란 '전혀 다른 것으로 간주되었던 분야의 학문들이 서로의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각 분야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여 연구하는 경향'을 뜻한다. (...)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등 학문의 큰 범주를 넘나들고, 미시·거시적인 접근을 포괄하여, 총체적인 학문 영역 간 협력 활동까지 등장하였다. 이를 '다학제적'(多學際的, multi and interdisciplinary) 연구라고 한다.
대학생 때 들었던 인류학 교양 수업 교수님에 따르면, 옛날에는 서양 인류학자들이 머나먼 아프리카나 동남아 오지에서 정보를 알아오는 것을 의미 있게 쳤다고 한다. 모름지기 인류학 연구자가 해외에서 2~3년을 살다 오지 않으면 진지한 연구자로 대우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많은 현대 인류학자들은 자국에서 활동한다.
조사지에 도착해 나는 !쿵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채집 여행에 동행하고, 그들과 같은 오두막에서 기거하며 그들이 먹는 음식만을 먹고,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그들이 토론하고 논쟁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귀 기울여 들었다. 나는 직접 참여하고 관찰하면서 아주 중요한 관점을 체득했다.
마저리 쇼스탁,「니사」
언뜻 생각하면 인류학자가 자기네 나라에서 연구할 게 뭐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나에게도 30년간 살아온 한국은 너무나 익숙하다. 한국인은 빨리빨리를 좋아하고, 꼼꼼하고, 라면을 좋아하고, 매운 것에 환장하는 나라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대체로 사실이다.
그런데 한 발자국 더 깊게 한국에 대해서 들어가 보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인은 왜 빨리빨리를 좋아할까? 왜 라면을 좋아할까? 왜 매운 것을 좋아할까?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이런 것들에 대해 쉽게 설명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다른 예를 들어보자.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30대 프로덕트 디자이너인 말콤은, 김해에서 활동하는 패션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일자리를 구하고 어떤 작업을 주로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또는 유아 자녀가 있는 디자이너들의 사고방식과 그들이 가정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또 경기도에 사는 네이티브 개발자들이 여가 생활을 보내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들을 문화인류학적으로 연구한 민족지가 있다면, 그들을 위한 서비스를 설계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디자이너가 인류학적 사고를 배우는 것은 결코 어색하지 않다.
여러분은 사용자 분석을 진행하면서 "에스노그라피 인터뷰를 하자"라던가, "라포를 형성해야 해"와 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고, 또 직접 사용해 보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사용자 경험 연구에서 활용되는 인터뷰의 기술과 용어는 문화인류학에서 빌려온 것이다.
(1)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
에스노그라피는 Ethnos(사람들)와 Graphein(기록)이라는 두 그리스 단어의 합성어다. 인류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질적 연구방법으로, 우리말로는 민족지, 또는 문화기술지라고 한다. 이는 하나의 기준으로 묶일 수 있는 어떠한 사회 공동체의 일상적인 경험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연구 기술이며, 단순히 행동이나 현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러한 행동들의 기저에 깔린 의식구조나 의도까지를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에스노그라피는 디자인 리서치에 섀도잉, 관찰 조사, 포커스 그룹 인터뷰 등의 형태로 적용되었다. 인류학에서 활용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디자이너들이 특정 이론이나 레퍼런스를 보고 가설을 세우기에 앞서, 직접 사용자들 속으로 들어가 현상을 관찰하고 그 의식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이러한 방법론을 활용할 수 있다.
(2) 라포Rapport
또 우리는 사용자 연구를 진행할 때 진행자가 참여자와 라포를 형성해야 한다는 말을 곧잘 쓰곤 한다. 라포는 인류학자들이 현지 조사에서 현지에 있는 사람들과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외부자에서 내부자로 자연스럽게 편입되는 것을 말한다. 라포를 성공적으로 형성한 인류학자는 연구 대상인 집단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내부자의 관점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모든 디자이너는 공급자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노력한 만큼 잘 되는 것도 아니다. 만약 디자이너가 인류학자들이 사용하는 리서치 마인드셋을 배울 수 있다면, 서비스를 사용자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디자이너가 자기 디자인 결과물에 애착을 가지면서 생기는 커뮤니케이션 고착이나, 자기중심적으로 데이터를 왜곡해서 해석하는 오류들을 제거하는 데 탁월할 수 있다.
참여와 관찰을 중시하는 인류학적 리서치 방법론은 통념, 특히 기본 귀인 오류라는 심리학적 경향성을 제거하는 데 효과적인 무기다.
기본 귀인 오류란 상대방의 행동의 원인을 추론하는 데 있어, 상대방의 상황이나 외적인 요인들을 고려하지 않고, 상대의 기질적인 요인 혹은 내적 요인들의 영향을 극대화하여 평가하는 인지 오류를 말한다. 이런 인지 오류가 전 세계적으로 모든 문화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쉽게 관찰할 수 있어서 이를 ‘기본’ 귀인 오류라고 부른다고 한다.
귀인 오류는 이중 잣대로 일상생활에서 종종 발현되는데, 예를 들어 친구가 나쁜 성적을 받으면, 우리는 그가 공부를 못 하고 지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내부적인 요인을 먼저 생각한다. 반면 내가 나쁜 성적을 받으면, 그 이유는 지난밤 배가 아파서였다거나, 최근에 새로 나온 온라인 게임이 너무 재미있어서라거나 하는 외부적인 이유들을 떠올린다. 이쯤 되면 내로남불의 오류라고 해도 좋을 수도 있겠다.
인류학은 우리가 상대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대한 학문이라는 점에서, 귀인 오류를 극복하기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인식이라는 단어에서 책 하나가 떠오른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이 그의 인식론적 탐구를 개진한 「철학의 문제들」이라는 책에서, 그가 철학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을 인용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확실하다고 여기는 많은 사실들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모순들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확실성을 찾아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지식이란 그러한 확실한 것들로부터 유래되는 것이다.
버트란드 러셀,「철학의 문제들」
이를 하나씩 뜯어보면서 철학적 인식론이 사실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아보자.
(1) 우리가 확실하다고 여기는 많은 사실들
첫째로, 우리가 확실하다고 여기는 많은 사실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는 기존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실인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100% 확신은 못할지라도 아마도 실제 그런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통념들에 관한 것이다.
A 명제: 문을 닫고 선풍기를 틀고 자면 산소가 부족해져서 사망할 수 있다.
B 명제: 요즘 젊은 세대는 노포에 가지 않고, 그곳에서 식사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세련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A 명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확실한 사실이라고 오랫동안 믿어 온 상식이다. 약 5천만 명이 수십 년을 사실이라고 믿었지만, 이는 거짓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믿음이라는 것은 연약하다. 우리는 믿음과 사실을 구분해서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확실하다고 여기는 믿음들이 항상 사실인 것은 아니다.
B 명제는 어떤가? 언뜻 사실인 것 같지만, 섣불리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젊은 사람들이 세련된 것을 좋아하는 것은 대체로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노포가 세련되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인가? 젊은 사람들은 오히려 노포를 쿨하고 세련된 곳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또, 젊은 사람들이 노포를 가지 않는 이유가 그들의 내적인 성향(세련된 것을 선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리적/사회적 요인에 있을 수도 있다. 노포가 밀집된 곳과 젊은 사람들의 거주지가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고, 노포에 대한 정보가 젊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커뮤니티에 공유되지 않아 정보가 적을 수도 있다. 원인을 외부가 아닌 대상의 내부 요인으로 인식하는 것은 대표적인 근본 귀인 오류에 해당한다.
어떤 명제가 사실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 속으로 탐구해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섣불리 판단하면 공급자인 우리는 귀인 오류라는 인지적 편향에 빠지기 쉽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서비스를 만드는 데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
(2)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
둘째로,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이란, 우리가 상상이나 추측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아닌,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을 말한다. 즉 인터뷰와 관찰을 통해 우리가 실제로 사용자에 대해 경험하고 이해하라는 것으로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사용자에 대한 진정한 지식은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닌 우리가 "경험"한 것들로부터 나온다.
기본 귀인 오류는 디자이너의 눈과 귀를 가리는 장애물이다. 특히 귀인 오류는 우리로 하여금 사용자가 아닌 공급자 중심으로 서비스를 설계하게 하고, 결국 프로덕트를 성공에서 멀어지게 하므로 매우 치명적이다.
우리 디자이너가 사용자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얻는 방법은 인터뷰와 관찰이다. 인터뷰와 관찰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가지는 귀인 오류를 극복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디자이너로서 범하지 말아야 할 인지적 오류를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 앞서 설명한 인류학적 마인드셋을 우리 삶에 녹일 것을 제안한다.
레시피만 보고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보다, 양파의 단맛과 익힘 정도, 굵은 고춧가루와 고운 고춧가루의 차이를 알고 요리하는 요리사의 음식이 실제로 더 맛있다. 디자이너도 스스로가 수행하는 디자인 리서치의 뿌리를 알고 사용자 분석에 임할 때 더 좋은 서비스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선택적으로 인류학적 마인드셋을 활용할 줄 아는 디자이너가 되었을 때, 그렇지 않을 때보다 사용자 분석을 더 오류가 적고 편향되지 않게 수행할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더 적은 실패를 겪으면서 빠르게 성공하는 서비스를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사람의 삶은 문화에 의해 지배된다. 문화라고 하면 K-pop이나 패션을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더 큰 개념에서 문화는 우리 뇌 회로를 형성하는 관념의 틀로 이해해야 한다. 라면을 먹으면 김치가 땡기는 이유는 내가 능동적으로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관습의 힘으로 내재화된 한국 문화의 가치 체계가 발현된 결과다.
우리 사용자가 가진 문화적 가치 체계를 이해하는 것은 서비스 설계에 강점으로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이너가 문화인류학을 배우면 도움이 될 수 있다.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인류학 책을 한 권을 읽어보면 어떨까. 인류학을 시작하기에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가 매우 좋은 책이다. 마저리 쇼스탁의 「니사」는 인류학자인 저자가 칼라하리 사막의 수렵채집민 부족인 !쿵 족을 현지 조사한 결과를 정리한 유명한 에스노그라피다. 마지막으로 인류학 책은 아니지만 다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질문을 던지는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도 추천할만하다.
참고자료
4. 다학제적 접근(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
5. 디자인 리서치 방법으로 '에스노그라피'의 가치 by 피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