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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hill Jan 22. 2024

핑크 스무디

사이버펑크 SF 스릴러 


때는 새벽이었다. 하늘에서는 어둠이 내렸지만, 무지개 색깔의 네온 빛에 물든 도시는 아직도 잠들지 않고 있었다. 회사들과 아파트가 몰려 있는 도시의 중심지에서는 대부분의 이들이 잠에 들어 조용함이 도사렸으나, 도시의 가장자리 ‘올드타운’은 달랐다. 형광 빛깔에 잠긴 그곳은 불법 경매장과 유흥업소, 그리고 갱단들의 보금자리가 몰려 있는 곳이었다. 그런 올드타운에서도 사람들의 눈길과 발길이 잘 모이지 않는 외딴곳에 작은 건물 하나가 있었다. 건물의 출입문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사이보그 한 명이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굳게 잠긴 건물의 꼭대기층에서는 비밀스러운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게 네 임무야.” 젊은 남자는 침대 위에 종이 뭉치를 던져놓으며 말했다. 남자는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바라보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가 담배를 태우는 동안 침대에서는 한 여성이 종이들을 만지작거리며 그 내용을 훑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 아래로 몸 전체가 빛나는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녀는 사이보그였다. 종이들을 하나씩 넘기는 그녀의 얼굴에는 점점 생기가 사라지고 먹구름이 드리웠다. 그것을 끝까지 읽지도 않고, 그녀는 종이들을 침대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남자는 담뱃불을 끈 다음 여자를 향해 돌아섰다. 여자는 침대 위에서 고개를 축 숙인 채 주저앉아 있었다. “데이지.” 남자가 여자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 아래에는 숨겨진 칼처럼 날카로운 의도가 숨어 있었다. 데이지는 남자에게 바로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발끝부터 천천히 위로 훑었다. 인간의 살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완전한 금속으로, 매끈하고 가벼운 금속으로 이루어진 몸이었다.


남자의 조직에 몸을 담으며 데이지는 몸을 조금씩 교체해 왔다. 그럴 때마다 데이지는 더 강력하고 불멸하는 삶에 가까워져 갔으며, 조직에서 제공하는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그녀에게 주어지는 임무 역시 위험해져 갔으며, 그녀가 느끼는 내면의 인간성 역시 서서히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어느덧 그녀는 머리만 남기고 완전히 기계로 대체되어 버렸다. 남자가 준 종이에는 온갖 물질적 혜택, 그리고 사실상 불멸의 삶과 다름없는 조건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종이에 담겨 있지 않은 내용이 무엇인지는 데이지는 알 수 있었다. 완전한 조직의 도구가 되는 것. 자신의 인간성은 완전히 말살되고 위험하고 잔혹한 임무들을 도맡는 로봇이 되어 버리는 것 말이다. 데이지는 결코 그 길을 갈 수 없었다. 마지막 남은 인간성을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침묵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데이지는 고개를 들고 남자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저 이거 못 하겠어요.” 데이지는 낮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남자의 두 눈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자신의 의도가 정확히 전달되어야만 했다. 남자는 데이지의 말을 들은 후 말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던 그는 천천히 데이지의 뒤로 다가왔다. 그녀의 금속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그는 갑자기 그녀의 목에 칼을 꽂아 넣었다. 데이지는 그의 공격에 놀랐지만 그의 칼날을 한 손으로 재빨리 잡았다. 곧 데이지와 남자의 몸싸움이 시작되었다. 남자는 데이지의 약점인 머리를 가격하고 짓눌렀지만, 재빠른 데이지의 몸을 이길 수는 없었다. 데이지는 칼을 뺐어 남자를 찔렀으며, 결국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돌아설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조직의 고위 일원인 남자를 죽였다. 데이지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빨리 도망가야만 했다. 데이지는 자신의 몸을 가리기 위한 인간 여자의 옷들을 입기 시작했다. 검은 속옷에서 시작해 셔츠와 청바지, 가죽 자켓까지 입었다. 옷의 갑갑한 착용감이 오랜만에 느껴지자 인간 시절의 기억이 마음속에서 약간 되살아났다. 이런 옷과 가죽 자켓을 마지막으로 입어 본 게 언제인지, 마지막으로 인간 몸을, 가슴과 팔과 다리를 가진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도 않았다.


데이지는 창문 커튼을 닫은 다음, 남자의 시체와 옷가지를 침대 아래로 숨겼다. 언젠가는 들킬 예정이었지만, 자신이 도망치기 전까지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했다. 모든 정리를 끝낸 데이지는 탁자 위의 분홍 스무디 한 모금을 마셨다. 정신이 집중되는 듯했다. 이제 그녀는 정문을 피해 옥상으로 나아가 다른 건물로 도망쳐야만 했다. 그녀의 앞날은 안개가 낀 것처럼 불투명했지만, 데이지는 이것 외의 길을 걷고 싶지는 않았다. 굳은 마음을 먹은 그녀는 숨을 고르고 방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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