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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있지' 포용하는 척 좀 그만하자

by Life teller Andy

유연한 사고의 첫걸음, '그럴 수 있지!'라는 다섯 글자의 마법. 이 한 마디면 의견이 다른 사람과 대화할지라도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 있는 자세를 기를 수 있다! 나도 그렇게 믿었다. 믿음을 갖고 매번 뜻이 안 맞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그럴 수 있지.'를 반복해서 내뱉었다.

그랬더니 신기한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겠다. 애초에 가지고 있던 목적과는 다르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성향과 취향, 장단점이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말에 동의하지 못했을 때, 치열하진 않더라도 적당한 수준의 갑론을박이 오고 갔을 때는 보다 더 선명히 그 사람의 말과 행동 그리고 전반적인 모습들이 구체화되었고, 내 생각에 오류는 없는지 수정해야 할 사항은 없는지가 보다 더 뚜렷했다. 포용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꾸만 흘려보내고 잊히게 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이것도 하나의 현명한 필터링으로서의 기능이 될 수는 있다. 굳이 결이 맞지 않는 사람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마음 맞는 이들과의 시간을 쌓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 요즘이니 말이다. 그러나 마음이 맞는다고 해서, 결이 맞다고 해서 그들에게 박힌 생각과 의견, 행동 전부에 100% 동의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만일 그런 사람을 찾는다면 도플갱어를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마음이 맞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는 가능성 또한 쉽게 배제해 버리는 마법의 문장이 바로 '그럴 수 있지.'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매번 사람들과 크고 작게 부딪히며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고 남의 의견에 대해서 반박을 해야 하는 일상 또한 피곤하기 그지없다. 회사에서도 논쟁거리가 넘쳐나는데 굳이 사적 관계망에서 까지 투쟁에 힘을 쓸 여력은 없다.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참 께름칙해져만 가서 하나의 필터를 작동시켜 보기로 했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해?"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왜'라는 물음표 하나는 누구나 달아볼 수 있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남의 생각에 물음표를 쉬이 달아보지 못하는 생각보다 상황이 많이 보인다.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을 꺼내기 전에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생각보다 쉽게 머릿속이 정리가 된다. 누군가는 데이터를 근거로 논리적인 답변을 하고, 또 누군가는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여러 예시들을 읊어가며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물론 이 논리적 답변이 완벽한 정합성을 가진다는 것을 판단하는 데는 나름의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적어도 명확한 취사선택이 가능하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떠올라 동의할 수도 있고, 당장에는 동의를 할 수 없다 해도 집에 가서 곱씹어 보면서 자신의 사고를 확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여전히 반대의 입장을 고수하더라도 '그럴 수 있지.' 보다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며 존중은 하지만 동의하기는 어렵다는 나만의 입장을 다져볼 수도 있다.


반대로 '왜?'라는 질문을 했는데 근거가 명확하지 않을 경우를 살펴보자. 구체적으로 말은 하고 있지만 자신의 말을 자신이 반박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뭐 어찌어찌 받아들여 보려고 노력은 하겠는데, 진땀을 흘리며 답변을 하지 못하는 상황 또한 자주 연출되는 걸 보면, 자신이 내뱉은 생각을 자신 또한 확신하지 못하고 있음에 안쓰럽기까지도 하다. 이런데도 그들에게 '그럴 수 있지.'라고 과연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 말을 뱉은 사람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그리 깊지 않았다는 것을.


이처럼 '왜?'라는 질문 하나에는 상당히 강력한 마법 같은 힘이 담겨있다. 나는 이 말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모두가 건강한 사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고서 그냥 남이 말하는 대로를 받아쓰기하면서 '그럴 수 있어.'라고 사고를 떠넘기는 방식은 요즘같이 정보와 가치관이 다분화되고 넘쳐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보인다.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에 굳이 빠질 필요 없다. 남을 설득하는 데 있어서 논리성은 중요하지만 일부분이기도 하다. 수사학의 기본 원리에서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이 논리적인지, 감정적인 동요를 느끼게 하는지 이 삼요소가 균형적일 때 가장 훌륭한 수사라고 말한다. 따라서 논리 정연하게 말하거나 글을 쓰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일단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스토리텔링하는 것부터 출발하면 된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동화처럼 말하는 것은 이야기의 기본 틀이니 전문적인 방법이 필요하지 않다. 말이 어눌해도, 목소리가 떨려와도 상관없다. 그 자체로 감정적 동요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냥 이거 하나만 기억해 보면 어떨까? 남의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전에 '왜?'라는 말을 붙여보는 거다. 그럼 말하는 이 또한 자신의 생각과 사고를 더욱 확장하고 구체화할 수 있다. 듣는 이 또한 더욱 집중해서 들을 수 있고 설령 의견에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나는 그럼 어떻게 내 생각을 구체화할까?' 하는 사고의 다변화를 꾀할 수 있다. 포용과 견제 모두가 필요한 사회이지만 확실한 건 나만의 주체적인 가치관을 구축해야 그 두 가지 모두가 진심으로 선순환이 가능하다. 물론 나 또한 이렇게 겉번지르르한 척 글을 쓰지만 또다시 '왜?'라는 질문의 난관에 부딪혀 생각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사고의 확장은 이유를 탐구할 때 비로소 성숙해짐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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