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애도하는 모습은 다양하다. 보통은 슬픔이란 감정이 발현할 텐데, 그 슬픔은 온전히 남아있는 사람들, 즉 죽지 않은 자들이 소유한다. 죽음은 살아있는 자들로서 완성되는 역설적인 현상이다. 죽음은 죽은 자의 것이 아니다.
내 인생에서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감정이 역류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바로 할머니의 죽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난 동생들과 큰집을 자주 방문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그런 우리 형제를 항상 이뻐해 주셨다. 다만 할머니는 무뚝뚝하신 분이었기에 그 이쁨을 표현하는 방식이 보편적인 방법과는 사뭇 달랐다.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을 곧잘 해주시며 맛으로서 이뻐해 주셨다. 저녁에 구들방에 누워 계시면 허리를 주물러 달라고 무뚝뚝한데도 애교 섞인 목소리로 부탁을 하셨다. 고사리손이었다 해도 삼 형제의 손이 어루만져지면 밭일로 쌓인 당신의 피로가 금방이라도 풀리셨다고 했다. 할머니는 얼마 안 가 따땃한 방 기운 때문인지, 나와 동생들의 어설픈 안마 때문인지 모를 노곤함에 빠지시며 잠을 청하셨다.
할머니는 가족 아무에게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으시려 했나 보다. 평상시와 다름없게 할아버지와 티브이를 보시던 와중에 갑자기 가슴에 답답함을 느끼셨고, 할아버지는 예감이 안 좋으셨는지 곧바로 119에 신고하셨다. 병원으로 가던 구급차 안에서 안정이 되는가 싶더니 할머니는 얼마 안 가 숨을 거두셨다. 이때 나는 서울에 살고 있을 때였는데 엄마도 할아버지와 똑같은 불길함을 느끼셨는지 119를 부른 직후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할머니가 응급실로 가고 있다고.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느낀 그 모호한 불길함은 나에게도 급격히 와닿았지. 하던 일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는 불안은 곧 격정에 치달았다. 얼마 안 가 고모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모는 할머니의 부고소식을 말이 아닌 통곡으로 대신했다. 가슴이 시림과 동시에 뜨거웠다. 시야는 먹먹했고 목은 따가웠다.
할머니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나는 상주는 아니었으나 할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들과 함께 상주 중 한 명의 자격으로 삼베옷을 입고 조문객들을 마주했다. 나는 삼일 간 할머니를 뵈러 온 모든 사람들의 면면을 볼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부고로 인해 시작된 슬픔은 각자에게 너무도 다양하게 발현되었다. 아버지는 눈물 대신 묵묵히 빈소를 지키시며 이따금씩 조문 오는 지인들을 미소로 반겼고, 평소 큰집과 관계가 소원했던 둘째 작은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 무언이 슬픔이었다. 억장이 무너질 듯 무릎을 꿇고 울어 젖히던 고모할머니도, 할머니의 초상을 보자마자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고모도, 여태동안 고생 많았다며 지긋이 할머니를 바라보시던 서울에 살고 계신 할머니의 형제도, 할머니가 살아생전 베푼 고마움을 말씀하시며 소주와 함께 눈물을 삼키시던 고모부도, 모두가 할머니의 죽음을 품었던, 살아있는 사람들이었다.
할아버지는 울지 않으셨다. 119를 부르실 때에는 별 일 아닐 거란 생각으로 평안하셨고,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초연하신 듯했다고 한다. 장례식이 이어지던 삼일 간 할아버지가 눈물 흘린 적은 없었다. 장례식을 삼일씩이나 하는 이유가 슬픔을 고됨으로 잊기 위함이라던데 할아버지가 눈물을 보이시지 않음은 그런 형식적인 이유에 있지 않아 보였다. 장례 마지막 날 할머니를 땅으로 보내드리고 옷가지를 불에 태우는 저녁 의식을 마치고서야 할아버지가 뜨겁고 비린 눈물을 줄곧 흘리셨다는 것을 들었다. 고모와 동생이 남아 마지막 날을 할아버지와 함께 지냈는데, 조문객들, 가족들이 모두 떠난 큰집에 셋이서 부둥켜안고 새벽까지 우셨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의 죽음으로 슬펐고, 그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 덕에 슬픔을 놓지 못했으며,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보내드리는 격한 슬픔의 방법을 듣고서 눈물샘에 남아 있는 모든 울음을 쏟아내며 슬픔을 잠그려 했다. 할머니는 살아 계시지 않는다. 하지만 무덤으로서 현생에 계심을 말할 수는 있다. 그래서 나는 매년 제사에 참여하고 산소를 들러 할머니가 살아생전 좋아하시던 전병과 함께 향을 태운다. 향 냄새를 맡으시곤 할머니가 손주가 왔음을 알고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반기실 거란 당치도 않은 기대감으로 아무 말 없이 산소에 머무른다.
죽은 자들은 남아 있는 자들이 당신을 기억하고 있음을 알까. 난 모른다고 본다. 죽음은 또 다른 생의 시작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한 생명체가 그 숨을 다하고 생을 매조 짓는 유일한 형태라고 보기 때문이다. 죽음으로서 생을 살필 수 있는 존재는 남아있는 자들, 즉 살아있는 자들이다. 죽은 자가 단 하루만이라도 내 앞에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 떠나보낸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와의 과거를 들춰보며 추억이 내미는 아련한 마음, 이 모든 것은 살아있는 자들만이 탐닉할 수 있다. 그런 마음이 살아있는 자들의 삶에 차곡차곡 쌓이면서 비로소 생의 소중함을 알가가게 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조금이나마 정립할 수 있다. 어렵게 정립한 죽음이 비켜가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가 품고 있는 욕구일진대, 나는 아직 감히 그 두렵고도 차가운 현실을 받아들이기엔 초연하지 못하다. 이 또한 죽음을 정립하는 한 과정이라면 언젠간 죽음을 받아들일 날이 올까. 여전히 어렵고 두렵다. 그 두렵고 난해한 죽음 덕에 나는 하루를 부단히 부여잡을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삶과 죽음의 엄중함, 그것은 죽은 자들이 아닌 살아있는 자들에게 남겨진 숙명이리라.
할머니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