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녀는 당신의 mbti에 반하지 않았다

by Life teller Andy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


다들 소개팅을 나가면 자주 묻는 질문이겠지. 어디 소개팅뿐일까. 직장에서든 모임에서든 가장 먼저 나오는 질문 중 하나 일 것이다. 굳이 소개팅으로 이 MBTI에 대한 질문의 화두를 던진 이유는 누가 뭐래도 이성의 성향을 확인하고 그 성향을 통해 알아내려는 무언가를 활용하는 데 있어서 MBTI만큼 편하게 던질 수 있는 화두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한다. MBTI는 중요하다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말한다, 과학이라고, 그러니 믿어야 한다고. 또 누군가는 단지 아이스 브레이킹을 위해 요긴하게 활용하는 수단이라 말한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그저 비과학적 추론일 뿐이라며 자신을 다그친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MBTI가 하나의 문화로 점착한 지는 오래다. 나 또한 MBTI를 확인하고 그를 통해 문화생활에 조금이나마 윤택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다. 때론 흥미 유발의 수단으로써, 때론 관심 있는 이성과의 인연을 지속하기 위한 단서로서 활용하기도 하는데, 활용하면 할수록 자꾸만 거북하게 느껴지는 무언가가 생겨 이 글을 적게 되었다.


나는 요즘 소위 말하는 썸의 초입에 있다. 소개팅 자리를 한 번 가진 이성이었고 당연히 초반 탐색에 있어서 나는 MBTI를 유용하게 활용했다. 만남 이후에 그 이성에게 더욱 호기심이 생긴 나는 기어코 구글링을 통해 그녀의 MBTI를 탐구하고야 말았다. 나 같은 사람들이 즐비하다 보니, MBTI를 분석하여 궁합, 성향, 썸 타는 법, 연애법, 대화법, 꼬시는 법 등등으로 주제를 구분 짓는 콘텐츠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과연 그 콘텐츠를 생산해 내는 이들은 MBTI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전문적인 지식 습득을 하긴 한 걸까? 아니면 자신의 경험만을 토대로 일반화를 과도하게 해 버린 건 아닐까? 의뭉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결국 메신저의 신뢰도는 뒤로 한채 콘텐츠에 소비당하는 꼴이 되어버리는 나다. 그리고 참 우습게도 나는 마음이 가는 이성이 생길 때마다 그 이성의 MBTI를 확인하고 "그에 맞춰서" 내 행동 패턴을 유기체적 관점으로 넘나들고자 하는 욕구에 사로잡히고 만다.


줏대 없어 보이는 그 유기체적 관점은 결국 그리 좋지 못한 결말로 다가서는 시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당신이 이 글을 읽어간다면 내가 한심하게 보이기도 하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한심함을 넘어 허망함과 수치스러움이 밀려올 때도 있다. 이렇게나 자존감이 낮은 순간도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쓸쓸하지는 않다. 이미 나와 같이 어리석은 견해에 사로잡혀 MBTI의 노예가 되어 감정을 허비하는 이들은 수두룩하다. MBTI에 관련된 검색어를 다양하게 타이핑하다 보면 공통된 페이지들이 나오는데 대부분 특정 커뮤니티에 자신의 고충을 토로하는 글이다. 굳이 자신의 답답함을 일면식도 모르는 이들에게 들춰 보이는 심리를 나는 아직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글들을 살펴보는 일은 상당히 흥미롭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목을 끄는 글들을 취합해서 읽어 내려가다 보면 너무도 웃픈 지점들을 비슷비슷하게 보이는데, 바로 게시글에 대한 답글들이다.


"isfp는 절대 걸러야 함..."

"intp 남자랑 연애해 보니 너무 힘들던데ㅜㅜ"

"나 infp인데 estp랑 최악 궁합이라고 알았는데 나는 잘만 사귐."

"처음에 애정 표현 못하는 MBTI라던데, 솔직히 난 처음에 맘에 끌리면 카톡 무조건 하게 되던데?"

"걔네 원래 다 그래."


커뮤니티의 글들을 살피는 데 일정량의 시간을 쏟고 느껴지는 예기치 못한 위화감 덕에 이제는 MBTI와 이성 간의 관계성을 조금이나마 떨어뜨릴 수 있게 되었다. 이성을 향한 자신의 감을 믿지 못한 것일까. 이렇게 해서라도 그 사람의 마음에 들고자 부단히 노력하려는 인간의 진화론적 모습이라 봐야 할까. 이유를 불문하고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모든 텍스트는 자신이 겪고 있는, 또는 겪었던 불안함의 표상임이 분명하다. MBTI가 잘못한 게 아닌데, 그냥 서로가 안 맞았을 뿐이고, 욕 나오는 사람 한 명을 만나 똥을 밟았을 뿐인데, 모든 탓은 MBTI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우리는 사람과 사랑을 나눈다. 여덟 개의 알파벳으로 반죽된 열여섯 가지 조합의 기준으로 나누기엔 사랑은 너무나 신묘한 형상이다. MBTI로 분석하고 패턴을 학습해서 현실에 적용해 보는 것이 나의 불안을 설렘으로 치환하기 위한 노력임은 가상하지만 반례는 부지기수다. 반례가 많다고 MBTI의 과학적 정합성이 부족해서라고 탓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분석은 어디까지나 이리저리 흩어진 객관적인 데이터를 수집하여 정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인간은 자신, 그리고 타인의 데이터를 객관적으로 수용하는데 너무도 치명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넌 I 호소인이야!'라고 묻는다면 수용보다는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내가 알고 있던 나를 허무는 건 상당히 수고스럽고 오래 걸리는 일이니 말이다. 그 시점에서부터 객관화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소설가 김영하는 자신의 MBTI를 비밀로 두고 있다. 내 성격과 성향을 내가 정의한다는 게 무의미하기도 하고, 객관에 다가서려면 자신의 행동거지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야에서 판단되는 것이 보다 더 적확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이 말에 나 또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내가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표상은 너무도 다양하다. 그러니 알파벳 따위에게 나를 맡겨서도 안 되고 맡길 필요도 없다. 누군가는 나를 I라 볼 것이고 누군가는 나를 E라 칭할 것이며, 직장에선 나를 냉혈한이라 보고 T라 결부 짓고 또 누군가는 나를 소심함과 섬세함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F를 지녔다 판단할 것이다. 본디 인간이라면 한 결 같아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나는 이 말을 믿지 않는다. 인간은 본성과 함께 다양한 환경을 접하며 골똘히 자신의 존재 가치를 고민하며(또는 고민 당하며) 지속적으로 실존을 탐닉하는 입체적인 유기체임을 확신한다.


그러니, MBTI를 욕할 필요도 없고 남들이 믿는다고 나 또한 따라 믿을 필요도 없고, 상대방이 대화에서 MBTI를 묻더라도 의무감에 빠져 혹은 그들에 맞춰서 답할 필요도 없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인간관계를 이해관계로 시작하고 그 이해관계를 나의 주도로 정립하여 건전한 관계로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노력만큼이나 중요한 요소가 있음을 잊지 말자. 자연스러움. 나 다움을 이해하자. 누군가에게 설레어 평소 보이지 않는 애교를 보이는 모습 또한 나다. 많은 사람 앞에 나서는 게 쑥스럽다가도 멍석 깔아주면 또 누구보다 매력적인 나도 나의 모습이다. 괜히 남의 눈에 잘 들어보려고 MBTI 같은 것을 분석하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뒷맛이 씁쓸해짐을 알게 되어 괜히 MBTI를 욕하는 그런 구차한 상황은 이제 그만.


그래도 외로운 건 외로운 거다. 연애가 하고 싶어졌다.

keyword
화, 토 연재
이전 18화죽음은 죽은 자의 것이 아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