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살아내야 할 시간은 내 앞에 수두룩하게 쌓여 있기에, 그래서 아직 내가 깨달은 무언가가 조립이 완성된 장난감이 아님을 잘 안다. 그렇기에 내 생각을 글로 풀어내어 누군가에게 내놓아 보이는 행위가 상당히 괴롭다. 그럼에도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핵심적인 이유가 바로, 과정을 온전히 담고자 함에 있다.
몇 년 전 헬스장 회원권을 처음으로 끊고 어수룩하게 눈치만 보고며 어슬렁거리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주욱 헬스장을 다니고 있다. 백 킬로에 육박하던 내 몸무게에 들러붙은 온갖 잡동사니 같은 불순물을 제거하고 싶어서 운동을 시작했다. 유일한 해결책이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운동이라니. 괴로웠던 과정이 지나고 이제는 하루라도 쇠붙이를 들춰 올리지 않으면 하루가 낯설 어보일만큼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내 몸은 인간의 정상 범주라 불릴만한 영역으로 돌아왔다. 더 욕심이 붙어 울퉁불퉁하고 튼튼한 몸을 가지고 싶었다. 나름 운동에 열심히였으나 안타깝게도 외관은 그리 획기적으로 달라져 보이지 않았다. 결괏값에 따라서 동기가 떨어질 법도 하지만, 그보다 더 안쓰러운 일은 이제는 운동 없이는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간다는 현실이다.
딱 하나 나에게 희망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면 과정을 즐기게 된 된 것이라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근육의 쓰임새를 알게 됐고 그에 따라 자극에 집중하는 역학적 원리를 깨닫고 있다. 근육은 힘을 쓰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내려놓는 법을 알기 위해 존재한다는 철학적 고찰도 경험하게 되면서, 인생 그 자체에 쓰임새를 조금이나마 더 잘 이해하게 됐다. 무분할, 이분할, 오분할 등 보디빌딩이라는 운동의 방법론을 터득한 시간들보다 그 방법론 너머에 더욱 본질적인 근육의 성장 과정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이 나를 더 기쁘게 한다. 그래서 다시 무게를 낮추어 다른 운동법으로 접근해야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도 기꺼이 새로운 시도를 받아들이게 되며, 그와 동시에 과거에 근육이 겪어온 과정을 들춰보며 용기 있게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과정의 진미를 논할 때 '일'을 절대로 빼놓을 수 없으리라. 이력서를 고쳐 쓸 때 가장 기억에 의존해도 쉽지 않은 순간이 있는데 바로 숫자를 채워넣을 때다. 매출은 얼마였고 성장은 얼마나 했으며 그 성장률 속에서 쪼개지는 무수한 지표가 어떻게 되는지, 정량적 문자들에서 논리적 성과들을 돋보여내야 서류 합격 확률이 높아진다. 난 참 애석하게도 그런 숫자에 약하다. 몇 년 전 성과들을 써 내려가려면 상당한 수고스러움이 느껴진다. 기억에 의존하기엔 확실치 않다. 전 직장 동료에게 부탁하거나 회사의 과거 보도자료들을 찾아내어 겨우겨우 숫자들을 끼워 넣는다. 근데 또 신기한 것은 그 숫자에 의미를 부여해 줄 스토리텔링, 즉 내가 어떤 과정으로 그 성과를 내왔는지를 활자로 적어낼 때만큼은 거침이 없다. 그 프로젝트를 왜 하게 되었고, 어떤 과정을 통해 무엇을 했고, 그랬더니 어떤 성장을 느낄 수 있었는지, 기억의 잔상은 꽤나 또렷하게 글자국에 남았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라는 말을 나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결과를 요구하는 상황이 과정을 높이 평가하는 상황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지금 이 글을 적는 와중에도 난 과정을 '평가하는 상황'이라고 설명을 적어내며 기어코 결과의 정합성을 논하고 있으니 말 다 했지.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건 과정과 결과의 관계성은 어느 쪽이 더 뛰어나야 하고 중요하게 판단되는 경쟁적 요소가 아니라, 어느 하나가 존재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이해관계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내가 삼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귀납적으로 체득한 것들을 전제로 얘기를 해본다면, 과정을 통해서만이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어 왔다는 것이다. 결과는 재기를 위한 일방적 수치에 불과할 수도 있음이다. 몇 년간의 운동에도 불구하고 울긋불긋한 몸을 가지지 못한 결괏값이 안쓰럽다가도 방법을 바꿔 다시 일어서보려는 노력은 내 과정이 헛되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내 사회생활은 꽤나 동적이었고 역경이었으며 시련이었다. 각 시기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건 숫자로 쓰이는 결괏값보다는 온몸에 배어져 가는 과정이었다. 숫자는 기억에 의존해서 얻을 수 있지 못했지만 내가 겪은 과정은 세포 사이사이에 이입되었다고 할 만큼 자연스럽게 나의 것이 되었다. 그 덕에 나는 내 또래들에 비해서 다양한 일들에 도전해 볼 수 있었다. 각각은 성과가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었으나 그다음 일을 도전함에 있어서 중요한 건 내가 겪은 과정이었다.
결과지상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 회의와 냉소로만 맞서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과정 덕분이었음을 이번 기회에 정리할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여전히 나는 한낯 평범한 인간이기에 여전히 결과가 가져다주는 압박과 불안 그리고 회의에 부대끼며 남은 인생을 쌓아가겠지만, 그 결과를 이뤄낼 수 있는(비단 실망스러운 결과일지라도) 과정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 결과만큼이나 그 과정 자체가 나를 정의하기도 한다는 것, 내가 쓰러져 있을 때마다 과정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남은 생이 그리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래도 너무 고달픈 건 싫으니까 적당히 고달프자 인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