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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나 독서나 별반 다르지 않은 이유

by Life teller Andy

나는 매년 사주를 본다. 맨 처음 사주라는 걸 몸소 접해본 건 이십 대 중반의 일이다. 이십 대의 풋풋함을 넉넉히 즐기라는 매우 평범한 과업이 나에게는 너무도 녹록지 않았다. 계획 없는 무모함이 넘쳐흐르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알게 된 건, 수많은 사람들로 빽빽이 들어찬 도시 속에 나는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순식간에 밀려온 공허함은 고통이었다. 감히 내가 견뎌볼 수 있으리라 생각조차 못할 그 고통은 저릿함을 넘어 자아를 잠식시켰다. 그때 내가 의지할 곳이라고는 어머니뿐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무언가를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알고 계신다는 눈치였다. 곧바로 나를 고향으로 호출하신 어머니는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내가 태어나 맨 처음으로 사주를 본 곳이었다.

사주를 봐주시는 선생님의 얘기를 들으니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나의 주변을 맴돌았던, 하지만 그 당시 내 힘으론 도저히 정의하고 정돈할 수 없던 것들을 선생님은 말끔히 어루만져주었다. 도저히 가늠조차 안 되는 내 미래를 진맥 잡듯 진단하며 '벌어질 수도 있는 일'들에 대해 처방을 내렸다. 신기하게도 내 앞에 놓인 미래는 그녀가 말한 형태, 형질과 유사했다. 그에 따라 내가 취하게 될 행동은 역행이 아닌 순행의 길로 접어들었고 그에 따라 나는 그 큰 흐름 안에서 서서히 영점을 잡아갔다.

그 이후로 매년 나는 고향으로 내려가 그녀에게 지난 일들의 회고를 복기하고 다가올 날들의 처방을 받았다. 몇 년이 흘렀을까. 욕심과 욕구가 내 이성을 흐트러 트릴 때(그 당시는 몰랐다.) 나는 그녀를 찾아갔다. 절박하거나 애처로운 상황도 아니었고, 안정감이 충만하여 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혜안을 듣고 싶던 상황 또한 아니었다. 나는 그때 성공에 대한 도취와 그로 인한 오만스러움, 더 나아가서는 이제 사주를 보는 일은 나의 나약함을 방증하는 일뿐이라며 더 이상 그녀의 얘기를 귀담아듣지 않는 때였다. 그때의 얘길 귀담아듣지 않은 타격은 상당히 컸다. 난 그 해 그녀가 얘기해 준 지침과는 정반대의 행동들을 난발했으며(물론 그 선택을 했을 당시에는 그녀가 말한 내용을 기억하지도 않았다.) 그 행동에 대한 결괏값은 나로서는 상당히 후유증이 길게 남는, 내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상황을 초래했다. 그녀의 말에 역행했음을 그 일이 벌어진 직후에, 그녀와의 만남에서 바로 인지할 수 있었다. 때는 이미 늦었던 탓에 후탈의 여파는 온전히 나의 몫이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약 2~3년 간 더욱 내 삶에 반항을 일삼았다. 사주는 다신 보지 않겠노라, 내 인생 내가 결정하는 것일 뿐 그 의지를 저해하는 행동은 하지 않겠노라 당차게 선언을 하며 말이다.



나는 책에서 삶을 찾는 법을 택했다. 세상에 대한 현답을 제시하는 현인들의 책도 읽어보고, 과학적인 메커니즘을 통해 삶을 통찰하는 책도 읽어 봤다. 소설을 읽는다면 공감 능력이 늘고 삶을 감성적 사고로 바라볼 수 있다길래 문학도가 되어보기도 했다. 이 행동은 나로서는 대단한 수확을 안겨주었다고 볼 수 있다. 책에서 알아간 모든 것을 삶에 완벽히 이입할 수는 없다 해도 삶 밖으로 적시적소에 꺼내어 요긴하게 활용하는 날이 많아졌다. 내가 기쁠 때 책에서 습득한 감정과 지식이 동참했다. 내가 힘들 때 책에서 통감한 이론과 상황으로 침잠하는 고통을 이겨냈다. 내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여러 선택지를 책은 나에게 제안했다. 나를 어디론가 이끌어가는 것이 아닌, 내가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모든 상황의 지침이자 참고 사항이 되어 주었다. 때로는 책에서 얻은 것들을 적용해보려 하는 와중에 갑작스럽게 본능 와 욕구가 머릿속을 침투하여 미숙한 결과를 눈앞에 선사할 때, 나는 좌절해야 했고 우울해야 했다. 그리고 문득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주를 보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혹여나 사주에 색안경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그래서 나의 이런 조악하고 엉성하게 보이는 논리에 반박하고 싶은 욕구가 차오를 수 있는 상황을 대비해서 챗gpt의 도움을 받아 예상되는 반박을 나 나름대로 답해보려 한다.


사주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 이에 반해 책은 검증된 논리적 지식이 들어있는 매개체다.


사주 또한 과학적 근거에 기초한다. 사주는 분석적이고 통계적이다. 점이라 불리는 형이상학적 접근과는 전혀 다른 시작점이다. 사주의 출발은 명리학(學)이다. 학문이 그 뿌리에 있단 뜻이다. 학문이란 우리에게 깨달음과 가르침을 알려주는 매우 유익한 수단이다. 그런 맥락에서 책 또한 각가지 다른 영역의 학문적 지식과 생각 그리고 감정을 담아놓는 매개체이므로 시작과 취지가 사주와 다르지 않다. 다만 사주가 샤머니즘적 요소로 보이는 경우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사주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신묘함을 알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부각하여 부를 추구하려는, 속된 말로 신적 존재이기를 바라는 몇몇 이들 때문이다.


사주는 사람의 운명을 결정된 것으로 보는데, 책은 사람의 선택을 넓히는 도구 아닌가요?


한 번이라도 사주를 봤던 사람은 사주를 봐주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름을 알 것이다. 그 말은 신뢰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뿌리에서 시작한 학문일지라도 다양한 시야와 사고를 통해 도출해 내는 뜻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운명을 결정된 것으로 보는 학문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의 경향성을 보여주는 행위이며 그 경향성을 참고해서 선택의 폭을 넓혀가는데 그 취지가 있는 학문이다.

책이라고 다른가? 이 세상에 진리라 함부로 칭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이상 정답은 없다. 내가 믿고 싶은 것,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이 세계관을 구축해 나간다. 어떤 하나의 시발점에서 시작한 무언가는 누구를 거치느냐에 따라 해석이 분분해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책은 그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고로 사주나 책이나 그걸 풀어쓰는 이들의 해석이 다른 건 매한가지다. 또한 그를 통해 얻은 무언가를 알게 되는 우리의 해석도 다양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하지만 그럼에도 보편적 가치에서 사주는 호불호가 강하다.


책은 사회적으로 교양성과 지적 매력을 부각하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라는 이미지 덕에 그 쓰임새에 호불호가 적을 뿐이며, 사주란 앞서 말한 것처럼 그 사용성이 오염되는 경우가 있어서 쉬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뿐이다. 사주를 탓할게 아니라 악용하는 인간들을 탓할 필요가 있다.



사주는 태어난 시간에 따라 정해지지만, 책은 누구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데 어떻게 동일시할 수 있나요?


'정해진다'라는 매우 위험한 발상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경계심은 사주가 아니라 사람의 몫이다. 즉 시간으로 반죽된 무언가의 형태와 형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고 그 이해를 통해서 어떻게 반죽해 나갈 것인지는 오롯이 사람의 몫이다. 사주의 경향성을 택하는 것도, 그를 역행하는 것도 본인의 몫이다. 사주는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큰 흐름을 제시할 뿐. 선택은 우리 몫이다.


책은 시대와 문화를 반영하며 발전하는데, 사주는 고정된 체계 아닌가요?


사주상으로 불의 기운을 가진 자의 역량을 해석할 때, 카메라 앞에 서서 조명을 받는 일을 하면 좋을 것이라는 제시로서 그 시대와 문화를 반영한다. 즉, 고정된 체계를 통해서 오랫동안 싸여온 각양각색의 데이터를 정량화하고 분석하여 어떤 결괏값을 도출해 내는 데 있어서 시대상과 문화상을 반영하는 것은 사주도 마찬가지다.


사주를 보게 되면 그 말들이 의식되어 내가 나의 주체로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책은 책으로서 나의 삶을 건강하게 만든다.


반대로 묻겠다. 사주를 의식하는 것이 왜 주체적 삶에 위배되는 것인가? 삶을 의식을 함으로써 다가올 미래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정립하는 과정을 겪는 일은 지극히 주체적인 삶이다. 문제는 사주를 절대적 사실로서 그리고 절대적 행동 양식으로서 받아들이려는 인간의 욕구겠지. 나 또한 그런 시간을 보내오며 사주를 원망하기도 했으나 결국 그 시간을 들춰보면 사주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사주를 받아들이는 내 인식이 오염되었을 뿐이었다.

책도 그러하다. 책을 절대적으로 믿거나, 텍스터 힙이랍시고 책을 장식 삼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책을 받아들이는 좋은 자세인가? 난 아니라고 본다. 책을 곧이곧대로 수용하는 것은 남의 삶을 내가 살아보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떻게 해서든 책으로 알게 된 무언가를 자신의 삶에 은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국 사주나 책이나 그 안에 내재된 무언가를 참고하여 내 삶에 입히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맥락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누가 보면 사주를 맹신하는 대표 주자로 보이진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본질은 사주냐 책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에 대한 문제임을, 즉 우리의 수용성과 인식의 문제임을 말하고 싶다.


올 말에도 난 다시 사주를 보러 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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