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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약’이라는 개소리에 대하여

by Life teller Andy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예민하고 불안에 찌들어 사는지 완벽히 알 수 없다. 신이 아닌 이상, 아니 제아무리 신이라 할지라도 당사자의 걱정을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는지. 신을 믿든 믿지 않던 중요하지 않다. 걱정은 크기를 가늠하려 해도 해낼 수 있는 관념이 아니란 뜻이다. 우린 그저 그들의 걱정을 나의 경험과 직관에 빗대어 추론할 뿐이다. 그게 최선이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걱정 마.'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해결돼. 걱정 마.'


개소리. 격한 감정을 감추고 싶지 않다. 우리 모두 자신에게 반문해 보라.


'그래서, 시간이 흘러서 당신의 걱정은 사라졌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쉬이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조심스레 냉소해 본다. 물론 살다 보면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들이 있다. 사람에게는 망각이 존재한다. 오늘 알게 된 사실은 놀랍게도 하루 만에 과반 이상이 기억 속에서 소실된다고 한다(그래서 반복학습과 복습이 중요한가 보다). 하지만 사람의 삶이란 게, 삶에서 겪는 사건이라는 것이 교과서 속에 나오는 지식과 논리만큼 우직하지만은 않다. 우리는 안다. 우리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보통,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닥쳐오는 위협적, 투쟁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사실을. 뇌과학적 원리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든 그 사건들은 기어코 우리의 신경을 침투하여 뿌리내린다. 그리고 잠재적 의식 속에 자리 잡아 각자의 방어기제를 생성시킨다. 방어기제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일부가 된다. 누군가가 자신의 방어기제를 지적하는 순간 인간의 반응은 보통 부정으로 시작한다. 그말인 즉, 결국 우리는 과거의 그 사건을 현재의 우리에게 위협이라 판단하고 도피하거나 부정으로 투쟁하는 경향이 강하다.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그날의 통증.

시간은 결코 우리의 걱정과 불안을 흘려보내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견고히 우리 각자의 세계관을 구축해주는 강력한 접착제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우리가 느끼기엔 시간이 해결해 주었다고 믿고 싶을 뿐이다. 나 또한 그랬다. 부모님의 갈등으로 인한 학창 시절의 불우한 순간, 1평 남짓 고시원에서의 4년, 5년 간 다닌 회사에서 내쫓긴 그날, 사랑하는 사람을 내 과오로 인해 떠나보내야 했던 그때. 시간이 흘러도 결코 잊히지 않는, 망각이란 존재가 힘을 쓰지 못하는 그런 순간들은 언제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시간이 지나면 잊히겠지. 그렇게 시간에 의존한 채 수동적으로 삶을 살아가다 보니 남게 된 건, 내가 남긴 흔적들 속 피동적 잔상뿐이었다. 글, 말, 행동 하나하나에 피동적인 맺음을 난발했다. 결국 나는 시간에 의존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사건의 당시보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격한 감정에 사로잡히진 않겠으나 결국 시간에 의존한 대가는 트라우마라는 불편한 잔재를 남긴다. 유사한 상황들이 발생할 때마다 그때와 비슷한 감정적 결함을 느껴야만 했다. 시간이 흘러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망각의 무덤에서 튀어나와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갉아먹기 일수였다.


시련에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은 시간을 흘려보내는 데 있지 않다. 토악질 나오더라도 그 상황에 대처하고 수습하려는 능동적 마음가짐과 행동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삶 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련이 언제 또 출몰할지 모를 일이다. 그 시련은 과거에 우리가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데 대해서 제대로 값을 지불하라고 독촉한다. 이번에도 시간이 흘러가면 해결해 줄 것이란 바람만으로는 인생이 강권하며 건네는 독촉장으로 인해 또다시 무너져 내려야만 한다.


인간이라면 응당 겪을 수밖에 없는 통증이 있다. 세상에 처음 태어나질 때부터 인간은 통증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 통증은 나름의 상처를 만든다. 상처는 저마다의 깊이가 다르다. 약을 바르면 통증과 흔적이 금세 사라지는 상처도 있겠지만, 제 아무리 약을 발라도 흉터가 사라지지 않는 상처도 있다. 흉터가 지면 통증은 사라진다 할지라도 우연히 흉터를 바라보다 보면 문득 과거는 꺼내어지기 마련이다. 시간은 통증을 치유할 순 있어도 흉터 마저 흉 지지 않게 할 수는 없다.

자기 합리화에 빠진 사람들은 성장통과 흉터 지는 상처를 헷갈리곤 한다. 안타깝지만 이걸 구분하는 건 쉽지 않다. 지금의 나로선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명확히 있다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결국 나 또한 합리화에 빠져 시간에 의존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흉터 진 곳을 의식하고 되새기며 또다시 같은 통증에 빠지지 않도록 의식하며 나아가는 길 뿐인 듯하다. 그래서 지금은 흉터를 지우려 애쓰는 무지성한 행동을 줄이는 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으로 보인다. 다행인 건 이제는 그저 시간에 기대는 수동적인 모습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움을 탐닉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결국 흘러갈 뿐이다. 시간은 내가 흘려보내는 것도 아니고 흘려보낼 수도 없다. 과학자들도 쉬이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 시간이다. 정의하기 난해한 시간이란 존재에 기대라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가. 그러니 어쭙잖은 위로랍시고 시간이 해결해 줄 거란 막연하고 무책임한 말은 삼가했으면 싶다.


그나저나 시간 참 빠르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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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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