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라는 말이 너무도 못마땅했다. 기대를 낮추라니 가당치도 않다! 마음 설레는 무언가를 가슴속에 저며두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 여기던 때가 있었다. 설날과 추석이 다가오는 연초와 가을은 초등학생이던 나에게 가장 설레는 기대감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한 시기였다. 설날과 추석 전날은 기대감이 가득해 어찌나 그리도 잠이 오지 않았던지. 당일의 현실이 비록 내가 상상하며 기대하던 것과는 거리가 있다 할지라도 괜찮았다. 빨간 날이라는 상징성과 평소에 느껴볼 수 없는 연례행사의 즐거움만으로도 너무도 훌륭했기에.
반면에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크다는 말이 인간의 절대적 전제라고 결론을 내본 적도 있다. 성인으로서 사회에 내던져지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갖가지 형태로 출몰한다. 이런 비정형적인 상황들은 때론 생경함에 기인한 신선함과 행복을 눈앞에 선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실망, 갈등, 걱정, 그리고 불안을 야기한다. 상황의 경중에 따라 그리고 개인의 민감도에 따라서 힘든 감정을 망각하는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분명한 건 각자는 그 경험을 통해서 고유한 결측치를 마음속에 쌓아두고, 그에 따라 삶의 기대치 또한 조정된다. 그리고 보통은 힘든 시간들이 많았기에 기대치가 낮아질 때가 많다. 포부가 아닌 욕심으로, 쾌감이 아닌 욕망 섞인 쾌락으로 순수한 인간의 심리를 내리깔면 결국 기대치는 낮아지기 마련이다. 일련의 시간이 지나고 서른 중반을 앞선 나는 기대감에 무뎌진 도시인이 되었다. 기대를 내려놓으니 불안할 것도 줄어들었다. 불안이 줄어듦과 동시에 설렘도 줄어든다. 어쩌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설렘을 마주하다가도 또다시 실망 섞인 결론에 다다라서 기대치를 원래보다 더 낮추게 된다. 그렇게 기대를 낮춘 시간이 겹겹이 쌓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야와 생각은 비관과 냉소 그리고 더 나아가 염세에 가까워져 갔다.
삶, 자신 그리고 상대에 대한 기대치를 '이분법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딜레마는 인생의 진면목을 왜곡시킨다. 삶이란 우리가 정해놓은 예측치를 마음껏 넘나들며 자신의 역동성을 뽐내는 존재이다. 그 형태는 점이나 선, 즉 상대적이거나 일차원적 사고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곡면의 형태를 갖추고 있기에 기대치의 우위를 점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기대를 낮추면 실망도 낮아진다'는 전제가 참에 가깝다면 그의 대우 명제인 '실망을 낮추면 기대도 낮아진다'는 말 또한 참인 듯 들려야 할 텐데, 과연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실망감을 무한히 내려놓을 만한 전능한 존재일까?
기대치를 낮추자는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기대치를 한 껏 드높이는 걸 대단하게 볼 필요도 없다.
기대치를 낮춘다는 것은 본연의 나와 가까워짐을 뜻한다.
낮추면 낮춰지는 데로 내가 바라볼 신비한 것들이 늘어난다. 일상에 가까워진다. 무심히 지나친 주변의 것들에 피식거릴 수도 있다. 반대로 기대치를 높이면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 기분 좋은 고양감이 차오르며 나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성장의 소용돌이에서 역동성을 발휘할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에 대해 기대가 높지 않다는 말을 막연히 부정적인 통념이라 생각할 필요 없다. 그에게 있어서 현재 그 추정치가 지금의 그에게 딱 적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행여 기대치가 낮다 말할지라도 삶이라는 그의 그래프에 우리의 기대치를 대입해 보면, 오히려 우리의 기대치보다 훨씬 더 웃돌수도 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