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일'이라는 백신

by Life teller Andy

지난번처럼 이틀 만에 퇴사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다. 시간은 때론 느리게, 때론 쏜살같이 지나갔고 결국 입사 한 달도 꿀꺽 삼켜냈다. 한 달을 넘겼다는 나름의 안도에 대해 소회의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이제 겨우 한 달이 무슨 대수인 것인고 하니, 난 직전 회사에서 이틀 만에 관두고 나오면서 적잖은 충격을 느꼈다. 그 충격은 다행스럽게도 불편하거나 불쾌하진 않았으며 신선했고 새로웠다. 서른을 넘겼다고 하기엔 서른과는 꽤나 멀어져 버린 지금의 나에게 온전한 삶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삶에 대한 주도권, 그 말인즉 오롯이 나의 선택을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뜻과도 같다. 생존만을 위해 멀뚱히 참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이라는 자기 최면과 비슷한 되뇜으로 고용 불안정 속의 삶을 솎아내는 일 또한 오롯이 나의 몫이란 말이다. 그래서 이번 직장이 나에게 있어선 꽤나 절묘한 타이밍이라 할 수 있겠다. 전전긍긍하던 나에게 우연스럽게 찾아온 인연이랄까. 이력서를 넣은 지 한 달도 더 된, 그리고 정식 공고도 아닌 인재풀(t.o가 날 경우를 대비한 임시 공고) 지원을 통한 입사라니. 수많은 경우의 수를 따져봐도 평범하진 않은 경우이니 왠지 모를 뿌듯함은 덤이다.

이 주에 걸쳐 면접을 봤다. 합격 여부를 알려주기로 한 날의 오후 여섯 시가 다되어도 소식은 없었다. 세상에 절대성은 존재하지 않기에 탈락할 경우 살 궁리를 염두라도 하고자 집 앞 공원을 거닐었다. 아직 다 피지 못한 벚꽃에게 사랑이란 영양분을 나눠주는 커플들 사이에서 합격 소식의 기다림과 탈락했을 때의 대비를 모두 하려니 올해 봄은 작년과 또 다른 쓰라림이다. 용기, 아니 굳이 용기랄 것도 없이 결과는 알아야 했기에 여섯 시가 되었을 때 합격 여부에 대해 회사에 문자로 문의했다. 담당자는 다행히 곧바로 전화를 주었다. 결과는 합격. 들뜰 수밖에 없는 마음의 머리가랑이를 굳이 잡아끌진 않았다. 주먹을 불끈 쥐고 앞날을 걱정할 따름이었다.


출근 첫 주차이면서 셋째 날이었던 때 저녁, 나는 곧장 집으로 가서 씻지도 못하고 드러누웠다. 드러눕는 행위 외에 무언가를 할 여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에게 중력을 거스를 힘은 결단코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밤이 나를 지나감을 알아채지도 못한 채 아침을 맞이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고단함. 입사 전 나는 약 육 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어떠한 노동도 일절 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백수. 백수의 생활을 마감하고 다시 노동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것이 이토록 힘든 일인지는 난생처음 겪어본 일이었다.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업이 꽤 바뀐 편이 되어버렸다. 학원 선생, 극한의 초기 스타트업, 헤드헌터, ai 스타트업.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 어느 하나 내가 감히 과거에 겪어본 경험이 없는, 약 80%의 무모함과 20%는 젊음의 패기만으로 선택한 일들이었다. 그렇다. 모든 것이 내 선택에 기인한 과정이자 결과였다. 모든 과정과 결과는 항상 새로웠지만 그 새로움을 적응을 하는 데 있어서 딱히 체력적으로 부딪혀 본 기억은 없다. 뭘 하든 초반은 형언할 수 없는 설렘으로 시간이 연소되었다. 하나 이번은 달랐다. 입사 첫 주만에, 아니 삼일 만에 내 눈은 건조함에 뻑뻑거렸고 입술은 타들어갔으며 온몸에 기운이 빠져버렸다.

혼란이 밀려왔다. 과거에 비교해서 업무 강도가 그리 높지 않음에도, 이곳에서 해야 하는 일이 여태껏 해왔던 일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음에도 입사 삼일 만에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지금에 혼란스러웠다. 혼란은 더 큰 혼동을 야기했다. 직전의 내 선택에 대한 후회 비슷한 감정을 들먹이기 시작했다. 지금의 내가 내리고 있는 판단과 선택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 여겨졌다. 노동의 현장을 벗어난 육 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얻은 것이라곤 기초 체력의 하락이라고 생각하니 더없이 허무했다. 쉼을 위한 시간이라 여겼던 것이 정작 나에게 사회 부적응력을 키운 시간이었다는 생각에 꽤나 허망했다. 더 나아가서는 또다시 퇴사를 고민하며, 이 직장도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기적이고 충동적이고 무의미한 고민에 힘을 쏟아버리고 말았다.


다행이다. 혼란을 벗겨내고 퇴사하지 않은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입사한 지 한 달째가 아니라 퇴사하지 않은지 한 달째라는 데에 있다. 나는 아주 혼탁하고 지독한 독감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내 몸은 저항할 기운은커녕 삶을 갉아먹는 독감에 깊이 취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는 줄만 알았다. 그것도 입사만 삼일 만에. 회사를 다닌다는 것, 입사를 했다는 것은 나에게 독감에 걸린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일 뿐이었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했다. 난 일이라는 백신을 맞았다고 말이다. 갑작스러운 백신 투여에 내 몸은 당황했다. 몸이 당황함과 동시에 정신 또한 혼미했다. 침대에 쓰러져야 함이 마땅했고 잡념이 생기는 것이 당연했다. 내 몸 안에 들어온 항원은 그렇게 부단히 온몸 곳곳에 자신의 영향력을 알려야 했다. 내 몸과 마음의 면역체계에 는 새로운 존재의 출현으로 그동안 유지해 왔던 항상성을 재구성해야 했다. 재구성에는 여태껏 활용해 본 적 없는 방법으로 에너지를 발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라는 존재는 응당 내 구성 요소가 뒤엉키며 재정립해나가는 과도기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 기간이 끝나고 서서히 나라는 존재는 백신을 받아들이고 피하지 못할 삶이라는 바이러스에 투쟁할 기본 시스템을 구축해 냈다. 그게 바로 지금이라 할 수 있다.



돌이켜보니 말이다, 항상 변화의 과정에서 각기 다른 형질의 백신을 맞은 듯하다. 무난하게 적응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때마다 적응의 수준과 적응해야 하는 조건이 달랐을 뿐이었지 단 한 번도 백신을 맞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번엔 과거들과 달리 체력적인 고단함이 백신 투여의 반응으로 발현되었을 뿐이었다. 지금 이 회사에서의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질진 아무도 모를 일이다. 하나 다행인 것은 여전히 나는 노동의 마땅함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정당한 대가로서 자본주의의 삶 안에서 살 권리는 얻을 수 있는 존재임을 보다 더 선명히 알게 되었음이다. 낭만 위에 생존이 있을 수 없다. 성장 위에 생존은 택도 없는 소리. 모든 원리는 생존을 밑바탕으로 두고 이뤄진다. 물론 가끔은 모순적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나 과연 그것이 지속가능한 원리인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생존이 이토록 고귀하고 자연스러운 것임을 꽤나 쉽지 않게 터득해 가는 데 있으리라. 일이라는 백신을 맞다 보니 번뜩 드는 생각이다.


돈, 가치 있게 쓰되 아껴 쓰자.

keyword
화, 토 연재
이전 20화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