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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자 Oct 04. 2023

맏이 33. 고향에 들러

우리 유엔군은 작전의 폭을 넓히고 전방과 후방의 종심을 길게 했다. 그래서 우리 6사단 공병대대는 동두천 의정부 서울을 거쳐 경기도 용인 그리고 진천까지 오는 도중 도로의 정비 작업에 임했다. 후퇴하는 미군의 장비가 무리 없이 통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6.25 후퇴 시와는 다른 작업개념이었다.

추운 겨울의 후퇴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또다시 서울 시민의 피난길 그리고 이북에서 내려오는 피난민과 합쳐 어느 국도, 지방도를 막론하고 피난민으로 꽉 차서 남으로 내려간다. 때마침 내리는 눈은 금세 은세계를 이루었다. 피난민의 비통한 마음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피난민의 행렬은 우리가 작업하는 길을 한없이 지나가고 모두가 기진맥진한 상태다. 부모를 잃고 자식을 잃고 서로 친지를 찾으며 그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나름대로의 목적지로 걸어간다. 우리도 점점 남으로 내려갔다. 죽산, 진천, 청주. 오다 보니 벌써 이곳까지 왔다. 우리 고향의 부모 형제는 어떻게 됐을까. 가까이 왔으니 그동안 잊고 있던 나는 가족을 찾아볼 수 있는 기회에 기대를 걸었다.

결국 우리 중대는 보은군 회남면까지 와서 숙소를 잡았다. 회남국민학교였다. 우리의 임무는 이곳에서 대전까지의 보급로의 확보였는데 그 중 금강에 임시 다리를 가설하는 것이 주임무다. 당시만 하더라도 다리가 없어 차를 건널 수 있는 나룻배를 이용했었는데 작전에 활용할 수 없었으므로 우리는 그곳에 가교설치를 해야 한다. 필요한 자재가 없고 모두 현지 조달할 수밖에 없어 그곳 어부동리를 비롯 회남 부근 또는 인근까지 나가서 빈 가마니와 목재 등을 구했다. 나는 청원군 남이면사무소까지 가서 가마니를 구했다. 다행히 많은 가마니가 창고에 쌓여 있었다.     

나는 그 길로 떨리는 가슴을 안고 고향에 들렀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르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만 계셨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보은 외가로 피난 갔다고 한다. 크게 실망했으나 아버지가 계셔서 그동안의 일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눈물을 흘렸다. 여전히 집은 가난에 시달린 흔적이 눈에 띄었다. 

“아버지, 어떻게 사셨어요? 얼마나 배를 곯았어요?” 

하니 아버지는 

“염려 말어라. 그동안 네가 장교이기 때문에 면사무소에서 매월 한 가마니의 쌀 배급을 받어 큰 걱정이 없었다.”

며 나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걱정이 되었다. 그날 나는 미리 준비한 돼지고기를 내놓아 즉석에서 구워 먹으니 아버지는 정신없이 잡수신다. 

“아버지, 많이 잡숫고 기다리세요.” 

하며 나는 집을 나왔다. 아버지의 눈물을 생전 처음 보았다.

금강의 긴급 다리 공사는 그 추운 겨울에 강물에 들어가 교각을 짠 틀에 돌멩이를 놓아 일직선으로 교각을 물속에 정착시켜 그 위에 인근에서 벌목한 잣나무로 다리를 걸쳤다. 사병들은 오래 물속에 있지 못해 수십 명이 교대로 작업을 하니 드디어 가교는 완성되었다. 그날 사단 참모와 대대장이 와서 우리를 위로하고 그 다리로 GMC를 건넜다. 무사히 통과했으니 이제 대전(大田)까지의 보급로는 개통되었다. 우리는 그날 자축연을 열었다.

그동안 우리는 회남면 신곡리에 있는 회남국민학교에 숙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을 만났다. 피난 오다 가족들과 헤어져 친구와 함께 피난 가는 중이었다. 보따리를 가슴팍에 끌어안은 채 전쟁 중임에도 그들은 조잘대며 잘도 웃었다. 웃을 때 보이는 하얀 이는 전쟁과 상관없는 천상의 소녀임을 틀림없었다. 잠시 전쟁이라는 현 상황을 잊을 뻔했지만, 작전상 이동이 심했기 때문에 후일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물밀 듯 남하하던 중공군도 유엔군의 맹반격에 38선 부근에서 저지되어 일진일퇴의 상황이 계속되었다. 전투는 더욱 심해졌다. 우리도 결국 악전고투 끝에 또 춘천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금대, 양구, 금성까지 왔다.

이 무렵 미국과 중공, 소련 양쪽에서 휴전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모양이었으나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한 치의 땅이라도 영토확보에 혈안이 되어 매일같이 전투가 계속되고 우리도 그런 상황에서 보병 전투에 자주 임하게 되었다.

우리가 주둔한 곳이 강원도 금성군 주파리였는데 사방 거리에서 고개를 넘어 금성천을 낀 들 옆에 있었다. 주파리 골짝에 반지하 진지를 구축하고 우리는 상당한 기간 동안 이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6사단 사령부가 이곳에 있었고 사단 공병인 우리 대대도 이 부근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사단장은 백인엽 소장이었는데 후에 인천에 선인학원을 설립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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