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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택 Dec 01. 2023

방송국 입성

MBC <뽀뽀뽀> 합격하셨습니다. 출근하세요



 가족 빼곤 누구의 면회도 없던 군 생활도 어느덧 말년이 됐다. 그때부터의 하루하루는 정말이지 더럽게 더디게 흘렀다. 그러던 중 컴퓨터가 생겼다. 행보관이, 컴퓨터  하는 병사들 부려 먹으려고 갖다 놓은 중고 컴퓨터였다. 역시 병사의 주적은 간부다.     


  "!!!"

 포토샵이 있었다. 선아 누나가 말했던 어도비 포토샵. 이것이 영상 편집의 기본. 이것부터 배우라고 했었다. 행보관님! 충성! 그때부터 선아 누나의 커리큘럼을 시작했다. 일단 당시 유행하던 '무작정 따라 하기' 류의 포토샵 책을 구했다.


  누나는 어떤 프로그램을 하든, 첫 번째는 '단축키 외우기'라고 했다. 단축키부터 외우고 무작정 따라 했다. 단축키가 손에 익으니 진도가 빨라졌다. 전역 전, 포토샵을 마스터했다.




 누나, 고마워요! 할 얘기가 많아요! 복학해서 가장 먼저 회사를 찾아갔다. 휴가 때 폰 분실로 연락처도 날아갔고, 그때도 '폰 포비아'라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회사가 없어졌다.


 어디 갔지. 연락처도 없는데. 한참 그 부근을 서성댔다. 누나, 제대하면 꼭 찾아오라고 했잖아요... 체념했다. 연이 끝나버렸구나. 그동안의 시간이 공간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상심했다.

 대신 새로운 도피처가 생겼다. 자취를 하게 된 것이다. 1학년 때처럼 견딜 수 없는 수업이 생기면, 자취방에 숨다. 군대를 갔다 와도 극복이 안 됐다.


 동기들이 학교 강의에 열중하고 있을 시간, 나는 선아 누나의 커리큘럼을 이었다. 포토샵 다음은 본체인 프리미어 차례였다. 똑같이 책을 따라 하고 익혔다. 그런데 부족한 부분이 보였다. 당시 프리미어는 키프레임과 마스크 기능이 약해서 애프터이펙트의 필요성이 느껴진 거다. 그래서 또 책으로 뗐다. 그러니 이젠 프리미어가 오디오 편집이 약한 게 자꾸 눈에 밟혔다. 당시 오디오 편집 툴로 괜찮았던 사운드포지를 독학했다. 딱히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남들이 뭔가를 할 때, 나는 다른 뭔가를 한 것뿐이었다.


 정말 한량이었다. 학교도 가는 둥 마는 둥 하고, 생애 첫 자취라는 자유를 만끽했다. 방 왼쪽 중고 TV에 투니버스 같은 만화 채널을 24시간 틀어놨고, 방 오른쪽 컴퓨터로는 라면 흡입하며 <신세기 에반게리온>,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카우보이 비밥>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들을 다. 지금은 메이저지만 당시 <페퍼톤스>, <라이너스의 담요> 같은 인디 음악과 <Cymbals>, <Lamp>, <FPM> 같은 일본 음악에도 빠졌다. 파일을 구하려고 종일 인터넷 서치를 하고, 없으면 독학했던 사운드포지로 녹음해서 내 MP3기기에 넣고 혼자 뿌듯해했다.


 한 마디로 남들이 공부할 때, 영상 보다가 지치면 누워서 음악 듣는 놈팡이었다. 그런데 웃기는 건 이 시간들이 지금도 내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거다. 놈팡이 생활에 대한 정신승리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영상을 보는 것, 만드는 것, 취향, 스타일. 모두 그 시절, 9할은 완성됐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웃풋을 낼 수 있는 건, 그때의 그 인풋들 덕분이다. 좋아하는 것만 쫓으며,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죽이고 있는 거 아닌가 불안한 사람들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아니라고. 잘하고 있는 건진 몰라도, 아니라고. 불안해할 시간에 좋아하는 거나 하나 더하라고.




 한량 생활 중이었지만, 그래도 방송 관련 전공과목은 듣는 편이었다. 방송제작실무라는 강의가 있었는데, 팀별로, 뉴스 영상 한 편을 만드는 게 최종 과제였다. 대여섯 명이 한 팀으로, 총 여섯 팀이 나왔다. 난 발표 울렁증 환자니, 촬영과 편집을 맡았다. 당시, 아버지가 일하시는 현장에 촬영이 필요해서 가정용 JVC 6미리 카메라가 있었는데, 그걸 빌렸다. 그렇게 뉴스를 만들고 나니, 동기지만 말 섞어본 적 없는 아이들이 다가왔다.


 "영택아. 저기..." 뭐지. 내 이름, 알고는 있었구나.

 "너 편집할 수 있다며?"


 그랬다. 동기들 대부분은 촬영과 편집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제출 기한이 다가오니 똥줄이 탄 거였다.


 "책 보고 해보려고 했는데, 봐도 뭔 소린지 모르겠어서..."

나도 책 보고 했는데, 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미안한데... 시간 되면 좀 도와줄 수 있어?" 그렇게 첫 부탁을 받았다.


 "아... 그래. 촬영은 했어? ...이따 우리 집에 올래?"

 "고마워! 이 은혜 평생 갚을게! 집이 어딘데?"

 "학교 앞에서 자취해."

 "어? 진짜! 언제부터 자취했는데?" 갑자기 친근해진 동기 놈이 덧붙였다.

 "진짜 고맙다. 뭐 필요한 거 없어? 사가지고 갈게."

 "그럼... 맥주나 사와."

3학년이 돼서야, 서로 전번을 교환하고, 편집을 도와줬다.


 그 후 내 자취방은 공용 편집실이 됐다. 편집 맛집이라고 소문이 났는지, 다들 이재민 구호하는 것 마냥, 쌀이며, 라면이며, 맥주, 과자 따위를 손에 쥐고 왔다. 학교에 중고 카메라 2대는 다른 팀들이 빌려 가서 촬영도 못 했다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팀들은 아버지 캠코더로 촬영까지 해줬다. 호구였을지언정, 나름 혼자서 익혀왔던 게 쓸모 있다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 다른 사람들이 날 필요로 한다는 게 나쁘지도 않았고. 그렇게 다른 팀 동기들의 뉴스 영상을 편집해 줬다.


 성적이 나온 날, 강의실은 웅성거렸다. 내가 C-를 받은 것이다. 출석 일수 미달이었다. 역시 대학은 공정해. 내가 만들어 준 영상으로 모두 A를 받은 동기들은 자기가 교수님께 말해보겠다는 녀석, 어떡해라는 녀석, 미안한 눈길을 보내는 녀석, 눈길을 피하는 녀석. 각양각색이었다. 하지만 액션을 취하는 녀석들은 아무도 없었고, 강의는 끝났고, 그 후로 내게 연락하는 녀석들 역시,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성적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일은 잘못된 방향으로 흘렀다. A라고? 내가 만든 게 먹힌단 말이지.. 몹쓸 자신감이 차올랐다. 방송국 PD가 돼야겠어. 이놈의 대학 밖에서 진짜 영상제작을 할 테다.


  한때 북적거렸던, 조용한 내 자취방에서 이제는 애니메이션이 아닌, 방송국 PD가 되는 방법을 서치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송 아카데미'를 발견했다.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두근대기 시작했다. 몇 개월간 이어지는 PD 과정이 있었고, 카메라, 스튜디오 실습 사진들이 있었다. 게다가 현직 PD들이 강사진이라니!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방송국에 취업한 후기들까지 살펴보니 확신이 들었다.


 '여기구나'     


 당시 나는 언론고시 말고는, 방송국 PD가 될 수 있는 루트를 전혀 몰랐다. 하지만 책상에 앉아 바늘구멍이라는 언론고시를 준비하기엔, 내 열망은 너무나도 실무 쪽으로 타올랐다. 그렇다고 방송국에 연결해 줄 교수나 선배 같은 인맥도 없었다. 아카데미가 그런 인맥이 되어 준다니 멋지다. 하지만 인맥은 돈으로 사야 했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더니 수강료가 백만 원이 넘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


 겨울방학 3개월만 빡씨게 일해서 수강료를 마련하자. 그날부터 알바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빈약한 경력의 이력서로, 지원하고 퇴짜 맞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알바몬 한 공고가 눈에 띄었다. 그건 주유소와 롯데리아 구인공고 사이에 있었다.


 'MBC 뽀뽀뽀 FD 구인'


 뭐지. 왜 이런 게 여기 있지. 그때만 해도 방송국은 뭔가 특별한 루트로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런 공고가 이질감 넘치게도, 주유소랑 롯데리아 사이에 껴있는 거지? ...FD는 PD가 아니라 그런가. 학교에서 FD는 플로어 디렉터라고 배웠는데, 촬영 날 스튜디오에서 잔심부름하는, 주유소 알바급의 시다를 구하나 보다. 입대 전 에어로빅 촬영장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뭐. 어때. 여기서 방학 동안 번 돈으로 아카데미에 가서 PD 과정을 밟아야겠다! 그리고 지원했고, 면접 일정이 잡혔다.


 여의나루역에 내렸다. 탁 트인 한강 보이고, <남자 셋 여자 셋>을 만든 MBC보였다. 조금 설레왔다. 하지만 그 건물이 아니랬다. 몇 블록 떨어져 있는 건물에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안을 들어가니, 넓은 사무실에 파티션으로 대여섯 공간이 나뉘어 있었고, 사람들이 있었다. 쭈뼛대며 <뽀뽀뽀>를 찾아왔다고 하니, 누군가 안쪽을 가리켰다. <뽀뽀뽀> 팀은 파티션 구역이 아닌 구석진 방을 쓰고 있었다. 노크하고, 한 여자에게 면접을 봤다.


 면접은 10분도 안 돼서 끝났다. 당시 나는, 알바 경험 때문에 PD라는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나를 면접 본 그녀는 후에 알고 보니 조연출이었지만, PD인 줄 알고 굉장히 공손하게 대답했다.


 "영상 일은 해본 적 있어요?"

 "입대 전에, 학교에서 근로학생으로 영상제작업체에서 일했었습니다."

 "휴학 가능해요?"

 "...네, 가능합니다."

방학 동안만 일할 생각이지만, 일단은 붙은 다음의 일이니까 거짓말했다. 그리고 끝났다. 그리고 그날 밤 문자가 왔다.


 "영 씨, 합격하셨고요. 월요일 오전 8시까지 오세요."


 방송국에서 일하게 됐구나. 이른 약속시각이었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넓은 스튜디오에서 마이크를 손에 들고 '잠시 후 녹화 시작하겠으니, 정숙해 주세요'라든가, 농담으로 관객들의 분위기를 살리거나 하는 내 모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상상됐다. 멋지면서도, '부끄러운데 어쩌지' 생각에, 혼자 얼굴이 빨개지고 입이 씰룩거렸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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